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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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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50 작성일 2022-06-20 22:22 댓글 0건 조회 177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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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1-

 

 

울 아버지는 1920년대 중반에 진부 쪽에서 태어나셨다.

좀 이해하기 쉽게 표현한다면 일제강점기 시절에 시골에서 태어나신 것이다.

 격동기에 태어나신지라 현대처럼 남들이 격지 않아도 될 일들을 많이도 겪으시면서 사신 분이다.

그 분의 일대기에서 젊은 날에 중요한 시절에는 대부분 전쟁터에 있었다는 것이다.

일제강점기에 일본군에 끌려가 갖은 고초를 다 겪고 살아 난 것 까지는 좋았었는데 6.25가 일어나면서 

거기에도 참전을 하게 되었다.

적어도 전쟁터에만 10여년 이상을 보냈다는 것이다.

물론 죽을 고비도 몇 번 맞이했지만 천운으로 살아서 그 이후의 생을 사신 것이다.

 

 

6.25가 끝나고 나라가 쑥대밭이 되어 버렸다.

쑥대밭 속에서 어려운 삶을 살아가자니 얼마나 힘들고 괴로웠겠는가.

지금처럼 전쟁터에 나갔던 사람에게 연금을 주던 시대도 아니었다.

전쟁터에 나가서 죽으면 그냥 거기서 끝나는 것이다.

인간은 그냥  소모품에 불과했던 시절이었었다그 전쟁을 마치고도 안정된 생활은 커녕, 

고난의 연속이었다고 본다.

지금처럼 애들을 한  두명만 낳던 시절이 아니었던 관계로 자그마치 4명의 자식을 낳아서 키웠다. 

찢어지게 가난하던 시절에 먹고 입기도 힘든판에 애까지 네명씩이나 달고 살아야 했으니 그 고충은 

이루 말 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런 험악한 인생여정에서도 삶을 일구어 현재의 우리 가족을 지켜왔던 것이다.

그 과정을 젊은 날에 듣긴 들었으나 강릉 토박이 어로 여사( 현대 표준 의미로 대충대충 개머리 먹 듯 하는 것)

 들었던 바람에 정확하게 내 머리에 각인되지 않은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진부에 면이리, 왕산에 안반데기, 고루포기를 넘나들면서 살다가 강릉 어단리로 내려와 좀 살다가 그 삶도 

힘들어 다시 구정리에 있는 자반둔지(이해하기 쉽게 표현한다면 최명* 강릉시장 시절에 동해임산에서

 골프장 만들기로 하다가 주민들의 반대로 물거품이 되었던 곳)로 올라갔다.

지금과 비교한다는 것은 무리가 좀 

있지만 당시에는 거의 화전민 생활 이상에서 벗어나지 못했다고 보면 될 것이다.

물론, 거기서 힘들게 사시다가 한 많은 일생을 마치셨다.

 

 

고루포기나 안반데기에 살 때에도 생활필수품은 강릉시내에서 조달했다고 한다.

필요한 물품이 있으면 물물교환 식으로 거래가 이루어졌다고 전해 들었다.

산속 화전민 생활에서 생산된 콩을 한 가마니 지게에다 짊어지고 강릉에 와서 소금을 한 가마니 바꿔서 

가져갔다는 것이다.

지금처럼 반지르한 포장길도 아니었을 것이다.

첩첩산중에 겨우 사람이 다닐 정도의 오솔길을 따라서 그렇게 지게질로 생필품을 날랐다는 것이다.

신발이나 옷 같은 것도 지금처럼 탄탄하지도 않았을 것이다.

오가면서 먹는 것은 오죽했을 것인가를 생각하면 가슴이 먹먹할 뿐이다.

맨 몸으로 고루포기나 안반데기에서 강릉에 왔다가는 것도 힘든 판인데 콩이나 소금을 한 가마니씩 

지게에 지고 다녔다는 것만 해도 좋게 말해서 대단한 힘의 소유자라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좀 억하게 표현한다면 죽을 고생을 하고 살아가셨던 것이다.

 

 

우리 아버지는 현대건설을 일구었던 정주영씨와 같이 힘이 좋으셨던 분이었다.

해서 어지간한 농사일을 주저 없이 잘 하셨던 분이었다.

예전에 도로가 신통치 않고 차량이 거의 없던 시절에는 순전히 지게질로 농사일을 처리했다.

요소나 복합비료 같은 것이 푸대당 25kg였던 시절에 구정 면소에서 5포씩 지게에 짊어지고

 자반둔지까지 날랐던 기억도 있다.

당시에 저도 아버지를 도와 비료 2포를 지게에 지고 날랐던 기억도 있었는데 당시에는 그 정도

량을 지고 가는 것도 고역 중에 고역이었다.

 

 

그것보다 더 강렬했던 경험도 있었다.

과거에는 소를 키울 때 지금처럼 시멘트 같은 것을 가지고 구유를 만들지 않고 산에서 직접 파 왔다.

아침 일찍 먼 산에 가서 구유가 될 만한 큰 소나무를 넘긴 다음 하루 종일 자구로 나무 내부를 파내는 

작업을 했다.

물이 탱탱 불은 소나무의 내부를 파내서 어느 정도 구유의 윤곽이 잡히면 지게에 짊어지고 내려왔다.

지금처럼 등산로가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고, 오로지 토끼길 같이 험악한 산악 길을 그 무거운 구유를 

지게에 지고 내려왔다.

지금 같으면 상상도 못할 일이 당시에 벌어졌던 것이다.

잘은 몰라도 족히 100kg은 넘게 나갔으리라 본다.

그렇게 파 온 구유를 걸어 놓고 소를 키워서 내 학비도 대고 생활비도 썼던 기억이 생생하다.

 

 

농사일은 또 어떤가?

구정의 자반둔지에는 논이라곤 없다.

오롯이 밭농사만으로 생계를 유지하던 곳이다.

봄이 되면 쇠똥으로 만든 퇴비를 일일이 지게에 져서 밭으로 날랐다.

당시에는 리어카라도 있었으면 힘이 조금은 덜 들었을 터인데 그런 기구도 없었다.

하루 종일 지게에다 바소가리를 얹은 곳에 거름을 담아 나른 것이다.

말이 쉬어 그런 일이지 실제 그런 일을 한 참만 해 보면 얼마나 어렵고 힘들고 고달프다는 것을 

알 수 있는 일이다.

 

 

땡볕에 옥수수 밭이나 조밭을 맬 때는 어떤가.

지금처럼 썬크림이 있는 것도 아니고 차양이 달린 모자가 있었던 시절도 아니었다.

엉덩이에 달고 다니는 그런 둥근 의자도 없었다.

오로지 쪼그리고 앉아서 김을 매고 또 맸다.

하루 종일, 아니 몇날 며칠을 매고 나면 손끝이 풀물이 들어서 새까매진다.

한 여름이 지나가면 손톱이 안으로 오무려들여야 하는데도 불구하고 밖으로 벌럭 젖혀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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