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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기 철마타고 달려본 시베리아 추억 - (15)크레믈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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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GO 작성일 2016-07-25 11:57 댓글 1건 조회 1,28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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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1. 상 ; 역사박물관 앞에 세워진 “주코프 장군”의 말탄동상

제2차 세계대전시 소련군 총사령관으로 히틀러의 독일군을 물리치고 1945년 베를린에서
독일의 항복을 받아낸 장군으로
모든 러시아인들에 의해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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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5월 9일 붉은 광장에서 시행되고 있는 “승전기념일”행사는 러시아에서 가장 큰 국경일이다. 온 국민이 거리의 퍼레이드를 즐기고 노병은 옛 제복에 훈장을 있는 대로 달고 나와 이 축제를 만끽하고 있다.


러시아 이곳 저곳 다니다보면 이 나라가 얼마나 군사력과 군인에게 투자하고 중요하게 생각했는지 쉽게 알 수 있다. 과거 소비에트 시절의 잔재들이지만 지하철과 건물 곳곳에는 총을 들고 진격하려는 동상들이 여전히 남아 있으며 전쟁에서 중요한 업적을 세웠던 사람들의
동상이 여기저기 있고 그들 앞에는 붉은 장미가 놓여져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런 러시아의 애국심을 볼 수 있는 곳이 하나 더 있다면
바로 무명 용사의 묘와
“주코프 장군 동상”이다.

 

주코프는 2차대전 당시 러시아를 침공한 히틀러의 독일군을 스탈린그라드에서 차례로 격퇴하면서 베를린까지 밀고나가 결국 나치를 붕괴시킨 소련군 사령관으로 모든 러시아인들에 의해 영웅으로 칭송받고 있다.

 

◉레닌그라드(현 상트페테르부르크) 900일 전투에서는 독일군의 침공으로 100만명이 넘는 시민이 굶어 죽어가면서도 지켜낸 레닌그라드 봉쇄전, 독일군의 불패 신화를 깨뜨린 스탈린그라드 공방전 등이 2차대전의 승기를 잡는 분수령이 되었다.

 

-흔히 2차대전은 미국을 주축으로 하는 연합군의 승리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 전투의 강도와 희생자의 수를 고려한다면 이는 곧 러시아와 독일 간의 전쟁이었다.

2차 대전에 참전한 10여 개 국의 전체 사망자는 4500만 명이며
그중 60%에 해당하는 2700만 명이상이 소련인이었다.


또한 2차대전 중 독일군 사망자의 80%는 소련과의 전쟁 중에 발생했다.

이때 독일과 러시아 간의 전투의 정점이라 할 수 있는 것이 바로 1941년 9월 25일 시작된 ‘레닌그라드 900일 봉쇄작전’이었다.

그것은 1944년 1월 27일까지 900여 일 동안 계속되었다.

도시가 봉쇄되고 보급로가 차단된 기간 동안 약 100만 명이상의 상트페테르부르크인이
포탄에 맞아 죽거나, 굶어 죽었다.

1941년경 330만 명에 달하던 도시 인구는 봉쇄가 종결된 시점엔 사망자와 피난민으로
인해 56만 명으로 줄어들었다고한다.

 

봉쇄 첫해 겨울 집중적으로 사람들이 죽어나갔다. 하루 사망자가 5천 명에 달하는 때도 있었다. 사망자의 수가 많아 시체 처리 시설이 마비될 때면 거리에 시체가 뒹굴기도 했다.

나무껍질은 모두 벗겨 먹어 하나도 남은 것이 없었고 책상의 다리나 책의 가죽을 벋겨 먹기도 했으며 심지어 인육을 먹었다는 이야기까지 전해진다.

 

그렇게 세 번의 혹독한 추위를 극한의 상황에서 버텨냄으로써 페테르부르크인들은 ‘레닌의 도시’를 초토화시키려던 히틀러의 계획을 좌절시켰다.

2차대전 중 독일군의 폭격 과정에서 생긴 상처를 고스란히 보존하고 있는 이삭성당의 거대한 기둥들처럼, 페테르부르크는 역사의 비극적 상흔들을 드러내놓고 보존하면서 과거를 기억하고 있다.


2. 중 ;  성 바실리 대성당(St. Basil’s Cathedral)

죽기전에 꼭 봐야할 세계 역사 유적으로 지정되어 있는 성 바실리 대성당 

러시아 모스크바 ‘붉은 광장의 수호자’ 성 바실리 성당.

 

일명 ‘테트리스 궁전’은 양파 모양의 8개 지붕(돔)이 각기 색깔과 높이, 크기를 달리해 비대칭적이지만, 절묘한 조화를 이뤄낸 것으로 유명하여 관광객들이 많이 찾는 곳이다.

 

그런데 이 성당에 얽힌 일화 ;~ 이 건물은 200여 년 동안 몽골의
지배를 받던 러시아가 몽골과 싸워 승리를 거둔 것을 기념해 지어 졌다고 한다.

 

35년간 식민지 생활을 한 우리가 일본에 대해 두고두고 분해 하는 것을 보면,

무려 200년의 몽곻지배를 참고 견뎠던 러시아의 통쾌함이 짐작이 가고도 남는다.

그러니 더 높고, 더 아름답게 지어서 온 세상에 러시아의 존재감을 알리고 싶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바램과는 무관하게 당시 러시아에서는 서 유럽의 발달된 문화를 동경하는 분위기가 싹트고 있었다.


프랑스 말을 사용하는게 이른바 ‘있어 보이는’시대였고, 프랑스 음식을 갖추어 먹을줄 아는 게 그 사람의 교양 수준을 말해 줄 정도였다.

톨스토이의“안나 카레니나”에서 러시아 귀족들이 프랑스어로 이야기 하고, 푸시킨의 글에서 프랑스 음식이 등장하는 이유도 같은 맥락에서 설명 될수 있다.

 

그런데, 이탈리아 건축가인 바르마와 포스닉이 지은 이 아름다운 건물은 이반 4세에게 이들 건축가가 두 눈을 뽑힌 슬픈 사연을 간직하고 있다.당시 이반 4세는 엘리자베스 1세 여왕이 이 건물의 아름다움에 매료돼 이들을 영국으로 불러 들였다는 소식을 접하고는 이들에게 ‘다시 이와 같은 건물을 짐을 위해 지어줄 수 있는가’라고 물었다.물론 이들은 ‘가능하다고 대답했고 이를 들은 황제 이반 4세는 그 자리에서 이들의 눈을 뽑아버렸다고 한다. 아름다움에 대한 집착, 화려함 속에 숨겨진 인간의 욕망을 말하듯 바실리 성당은 붉은 광장의 한 편에서 아름다움을 뽐내고 있다.


3. 하 ;  크레믈린 궁

 

모스크바를 여행하는 사람이 가장 먼저 찾는 곳이 크렘린 궁이다.

사람들은 그가 도대체 무슨 꿍꿍이 속을 가지고 있는지 모를 때 우리는 가끔 ‘크레믈린’같다고 이야기 하기도 한다. 친구들 간에도 속내를 감추고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도무지
짐작 할 수 없을 때 부르던 이름 ‘크레믈린’ 그 크레믈린이 세계인들에게 개방되어 있는 것이다.

 

원래 크렘린은 '도시 내부의 요새 성벽'이란 뜻이란다.

러시아를 제대로 보려면, 크레믈궁(크렘린궁`러시아 황궁)을 찾으면 된다는 말이 있다..

 

냉전시대 동토(冬土)의 중심에 크렘린궁이 있었고 세계의 이목이 이곳에 집중됐다.

하지만 소련이 붕괴되고 냉전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모스크바의 크렘린궁은 러시아를 대표하는 문화유적 관광지로 유럽등 세계에서 찾아온 관광객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는곳으로 변하여있다.

 

크렘린궁은 중세 러시아 당시 황제가 거처하는 성(城)이었다.

18세기 초 러시아의 부흥기를 이끈 표트르대제가 페테스부르크(現 상트페테부르크)로 수도를 옮기면서 황궁으로서의 기능을 잃었다가 1917년 러시아 혁명으로 모스크바가 다시 수도가 되면서 크렘린궁은 옛 소련정부의 본거지가 됐다.

 

그 때부터 크렘린궁은 소련정부와 공산당의 상징으로 떠올랐다.

 

사진에서 보이는 바와 같이 현재의 크렘린궁전은 모스크바강을 따라 높이 9~20m,
두께 4~6m 규모의 벽들로 둘러싸 여 있다.

 

 

황제의 처소였던 크렘린궁전은 총 길이 125m, 방 70개의 규모로 화려하게 건축돼 있는데
현재는 외국정부요인들을 접견하는 장소로 주로 이용되고 있다.

역대 소련 공산당 서기장들의 집무실로 사용됐던 러시아 대통령부와 소비에트
연방 내각관도 크렘린 궁안에서 관광객들이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지금도 러시아 대통령부에는 대통령의 집무실이 위치해 있는데 푸틴 대통령이
집무 중에는 러시아 국기가 게양되고있다.

과거 냉전시대에는 옛 소련 및 세계 공산주의 권력의 심장부로 일반인들의
접근을 상상할 수도 없었던 크렘린이 러시아의 대표적 관광지로 환골탈태한 것이다.


※ 옛 소련과 공산주의를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른 것이

    모스크바의 ‘크렘린궁’과 ‘붉은 광장’이다.

해마다 전승기념일등 각종 행사가 붉은 광장에서 거행된다.

옛 소련이 군사퍼레이드를 통해 미국과 쌍벽을 이루는

군사강국으로서의 면모를 전 세계에 과시하던 곳이다.

그래서일까. 붉은 광장을 찾으면서 약간의 긴장감이 없지 않았다.

하지만 붉은 광장 입구로 들어서는 순간 긴장감은 눈 녹듯

사라지고 감탄사가 절로 쏟아 졌다.

 

크렘린궁 성벽과 접해 있는 붉은 광장은 크렘린성벽, 성 바실리 성당,
국립역사박물관, 굼 백화점 등 그야말로 러시아의 대표적 건축물로 둘러
싸여 있는 매우 넓고 아름다운 광장이었다.

 

광장은 여름철을 맞아 전 세계 각국에서 찾아온 수많은

관광객들로 붐비고 있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개방의 물결을 타고 있는 러시아의

변화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았다.

원래 붉은 광장은 러시아어로 ‘크라스나야 쁠로샤지’라고

불리는데 ‘아름다운 광장’이라는 뜻이다.

현재는 ‘크라시바야’가 ‘아름다운’이라는 뜻으로, 크라스나야는

‘붉은 색’의 의미로 쓰이면서 붉은 광장으로 불리고 있다고

전해진다.



 

 

 

 


댓글목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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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택균님의 댓글

박택균 작성일

사람들은 바실리 성당을 러시아 대표 상징물로 여기고 있더군요..
아름다운 의 극치라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