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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4기 장강크루즈 여행기3-1 ; 백제성(白帝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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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RGO 작성일 2016-11-10 19:02 댓글 1건 조회 1,28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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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 설명]

<상> 백제성에서 바라본 구당협
(瞿塘峽)의 입구인 기문(夔門)

<중> 유비탁고(劉備託孤)

전쟁에서 패배한 유비는 백제성으로 도망쳐왔으나 신하들을 마주할 면목이
없었다.
그래서 백제성을 수리하고 영안궁을 지어 머무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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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근심에 사로잡혀 있던 유비는 얼마 지나지 않아 세상을 떠났고,

정권과 아들을 제갈량에게 맡겼다.
사서는 이 일을 유비탁고(劉備托孤)라고 기록하였는데

백제묘 내에는 유비가 아들을 맡기는 장면이 위 사진과 같이 꾸며져 있다.

 

처음에는 공손술을 모시던 사당이었다가,

명대에 들어 촉한의 유비, 제갈량, 관우, 장비를 모시는 사당이 된 것이다.

하지만 사당의 주인이 바뀐 후에도 공손술을 기리기 위해 이름만은
백제묘라 하였다고 한다.

 

 

<하> 이백의 시문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

백제성은 구당협의 입구인 기문(夔門)이 가장 잘 보이는 봉우리 꼭대기에
지어졌는데, 이 때문에 이백, 두보, 백거이등 중국의 유명시인들은 모두
이곳 백제성에 올라 기문을 구경하고 시를 지어 남겼다.

 그래서 백제성에는 시성(詩城)이라는 별칭이 생기기도 하였다.

 이백은 <아침에 일찍 백제성을 떠나며 ;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라는
 시를 지어 이곳이 유명해졌다.

 백제성은 봉절현성의 동쪽 8Km거리에 있다.

 원래는 산을 등지고 3면이 강과 마주한 모양이었는데
 삼협댐에 의해 수위가 높아지면서 섬이 되었다.



장강크루즈 여행기3-1 ; 백제성(白帝城)

 

 

 

▩ 셋째날 = 1 ; 삼국지 흔적 따라 물길 탐험,

               천하 비경 앞에선 세상사 잊고

…양자강크루즈의 백미인 삼협(三峽싼샤)과 백제성을 관광하는 날이다.


 

▶백제성(白帝城)

 

=과거가 녹아있는, 영웅의 고뇌가 깃든 백제성에서
 삼국지 영웅 숨결을 느껴보며 유비와 제갈량을 만나다.

 유비의 한(恨)이 담긴 사당(祠堂)탁고당(託孤堂)엔 “관광객 물결”만

 

중경에서 장강 크루즈에 승선한지 하루 반쯤 되는날 유명한 백제성(白帝城)에
당도했다. 백제성은 촉한(蜀漢)의 황제 유비(劉備)가 중원평정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좌절한곳으로 더욱 널리 알려져 있는 곳이다.

 

소설 “삼국지”에서 촉(蜀)나라의 유비가 임종직전 제갈량(諸葛亮)에게 아들을
맡긴 곳이 바로 이곳 백제성(白帝城)이다.

백제성과 마주한 교량을 건너 백제성 뒤편 계단으로 오르다 보면 장강삼협
입구인 구당협(瞿塘峽취탕샤)과 기문의 장대한 풍광을 바라 볼수 있다.

이곳이 중국화폐(인민폐) 10위안에 나오는 유명한 구당협과 기문의 배경으로
누구나 이곳에서 기념촬영을 하게 된다.

 

삼협(三峽싼샤)의 들머리는 구당협(瞿塘峽)이 있는 봉절(奉節펑제)현
선착장에 크루즈를 정박해 놓고 버스로 백제성(白帝城)투어에 나섰다.

 

약 1700여년 전의 동한시기로 거슬러 올라가는 깊은 역사를 지닌 백제성(白帝城)은 장강변에 위치한 명·청시기의 건축물 중 보존상태가 가장 우수한 유적이라고 하며,  명·청시대에 지어진 백제묘가 아직도 현존하고 있는 곳이다. 지세가
매우 험악하며 역사적으로 많은 군사가들이 이곳을 서로 쟁탈했던 곳이다.

 

이곳은 유비·관우·장비가 천하를 도모했던 ‘삼국지’의 무대이기도 하지만,
서한말기 왕망(王莽)이 한나라를 멸망시키고 신나라를 세우자 촉나라의 장군
공손술(公孫述)도 황제가 되고 싶어 이곳에 성을 쌓고, 방비를 굳게 하였는데
성 안에는 “백학정”이라는 우물이 있었다.

이 우물에서는 늘 흰 안개가 피어올랐는데 그 모양이 용과 같아서 이것을 본
공손술은 자신이 황제가 될 징조라 여겼다.
그래서 그는 자신을 '흰 황제'라는 뜻의 백제(白帝)라고 칭하고
그 성을 백제성이라 불렀다고 한다.

 

이후 유수(劉秀)가 왕망(王莽)의 신(新)나라를 멸망시키고, 한나라를 복구해
동한을 건립하면서 이곳으로 쳐들어와 공손술을 몰아내고 천하를 통일했다.

 

하지만 그보다는 촉왕 유비(劉備)가 숨을 거둔 곳으로 더 알려져 있다.

손권과 손을 잡고 208년 적벽대전에서 조조의 대군을 물리친 유비.
그는 형주 땅을 오나라와 반분한다. 그러나 익주 땅(쓰촨 성)을 놓고는 대립한다. 그러다 익주의 성도(成都·쓰촨 성 청두)를 차지하고 거기서 촉나라를 연다.
그러자 손권도 조조와 손을 잡고는 형주의 관우를 죽이고 그 땅을 차지한다.
그런 뒤 조조는 한나라의 왕위를 물려받아 221년 위나라를 연다.

이로써 후한이 사라진 중국대륙은 위.촉.오 삼국시대로 재편된다.

 

한편 관우의 죽음 이후 유비의 전략전술은 패착으로 일관한다.

223년 오나라를 상대로 설욕전을 펼치지만 오히려 패해 백제성에 피신한다.

그리고 유비(劉備)는 거기서 죽음을 맞이한다.

 

 이곳 백제성(白帝城)정상에 자리잡은 탁고당(託孤堂)들어서면 인물모형의
소상(塑像)에는 죽음을 앞둔 유비(劉備)가 제갈공명에게 아들 유선을 부탁하는
유비탁고(劉備託孤)의 무대로서로도 유명하다.
탁고란 자신이 죽은 후 남은 자식을 부탁하는 것을 말한다.

이곳에는 유비가 누워있고 그 앞에 아들 유리·유영 옆으로 제갈공명·조자룡·
장포·마충·마속 등 장군들이 서 있는 모습이 재현되어 있다.

죽기 전 유비는 이곳에서 제갈공명에게 유언을 남기는데 자신의 아들 유선이
영특하면 그를 도와 천하를 통일하고, 그렇지 않다면 제갈공명에게 나라를
맡아달라고 했다.

 

탁고당(託孤堂) 앞에는 제갈공명이 별을 보면서 점을 쳤다고 하는
관성정(觀星亭)이 있다.

 

성 입구엔 공명이 촉왕 유선에게 227년 올린 북벌상소문‘출사표(出師表)’
를 새긴 거대한 비문도 있다.
공명은 그로부터 7년 후 위의 사마의(179∼251)와 대치 중에 생을 마감한다.


마오는 백제성에 와서 그 흘러간 역사를 바라보고
‘시비와 성패가 다 부질없다(是非成敗轉頭空)는 말을 남기고 갔다.

 

백제성 안에는 현대 중국의 권력자들이 쓴 글씨가 남아 있었다.


마오쩌둥, 저우언라이, 장쩌민이 8세기 중국 시인 이백의 시

‘백제성을 일찍 출발하며(早發白帝城)’를 베껴 쓴 글씨였다.

마오의 글씨는 아름다웠으나 너무 휘갈겨 썼고,

저우언라이 총리의 글씨는 단정했으며,

장쩌민 전 주석은 교과서체와 같았다.

 

‘아침 일찍 구름 낀 백제성을떠나(朝辭白帝彩雲間),

 천리 먼 강릉을 하루에 돌아왔다(千里江陵一日還)’
시작하는 이백의 시를 해석해 들으니, 더 이상 좋을 수가 없었다.

 

마오는 백제성에 다른 글씨를 남겼다.

그중 ‘시비와 성패가 다 부질없다(是非成敗轉頭空)는 내용이 눈에 띄었다.

 

이곳에선 작은 배를 갈아타고 소수민족인 토가족(土家族) 거주지를
관광했다.

장강의 지류를 구경하는데 수억 년 된 퇴적암이 융기한 양쪽 바위들이

세월을 느끼게 했고, 토가족의 과거 장례 풍습인 현관(懸棺)이 절벽

낭떠러지에 아직도 걸려 있는 걸 보았다.      

 

또한 이곳은 당나라의 유명한 시인 이태백의
'아침에 백제성(白帝城)을 떠나며'
즉, 조발백제성(早發白帝城)이라는 시에 등장하여
더욱 유명해 졌다고 한다.

 

‘아침에 백제성을 떠나면서’(早發白帝城 ; 이백)

 

      조사백제채운간(朝辭白帝彩雲間)

      천리강릉일일환(千里江陵一日還)

      양안원성제부주(兩岸猿聲啼不住)

      경주이과만중산(輕舟已過萬重山)


   아침 일찍 오색 구름 감도는 백제성 이별하고
   천리길 강릉을 하루만에 돌아왔다네
   강기슭 원숭이들 울음소리 그치질 않는데
   가벼운 배는 만겹의 산을 지나왔다네

반란죄로 유배를 가던 이백이 백제성에서 사면 받고
너무 기뻐서 천 리 길을 하루 만에 돌아왔다는 내용이다.

이백은 만년에 영왕(永王) 이린(李璘)의 거병에 가담하였는데, 이린의 거사가 실패하자 그도 체포되어 지금의 구이저우성(貴州省) 서북부의 야랑(夜郞)으로 유배되었다. 야랑으로 가는 도중에 백제성(白帝城)을 지나면서 이백은 자신의 사면 소식을 접하였고, 자유의 몸이 되어 강릉으로 돌아가면서 이 시를 지었다.

제목은 '아침 일찍 백제성을 떠나며'라는 뜻이다.
백제성은 쓰촨성(四川省) 펑제현(奉節縣) 동쪽의 백제산(白帝山)에 있는 산성이며, 강릉은 후베이성(湖北省) 장링현(江陵縣)으로 두 곳의 거리는 양쯔강의 물길로 약 300㎞이다.

양안(兩岸)은 무산(巫山)과 협산(峽山)의 양쪽 언덕을 가리키며, 그 사이로 양쯔강이 흘러가는데 강폭이 좁아 유속(流速)이 최고 시속 24㎞에 이를 정도로 빠르다고 한다. 또 이곳은 원숭이들이 많은 지역이다.

유배에서 풀려난 이백은 한시라도 빨리 속박으로부터 벗어나고자 아침 일찍 서둘러 백제성을 떠나 배를 타고 강릉으로 향한다.
강가 양쪽 언덕에서 쉴새 없이 울어대던 원숭이들 소리가 아직도 귓가에 남아 있는데, 세찬 물살에 가벼워진 배는 겹겹이 쌓인 산들을 빠르게 지나 천리길 같은 강릉에 하루만에 도착한다.
자유의 몸이 된 기쁨을 빠른 물살처럼 경쾌하게 묘사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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