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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 생도시절의 6.25참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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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24회 김연식 작성일 2010-06-11 16:20 댓글 0건 조회 3,302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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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4회 김연식 입니다.
이글은 해군사관학교 총 동창회에서 발행하는 계간지인 "옥포"지(2010.4)제82호에 필자가 기고한 내용 입니다.
6.25전쟁을 체험하지 못한 강농동문 후배님들 그리고 모교의 재학생 후배님들을 위해 선배된 한 사람으로서 당시에 겪었던 체험을 사실대로 글로 정리한것이니 60년전 일이라 다소 미흡한점 있드라도 이해해 주시고 일독을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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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사 생도시절의 6.25참전


서언

최근 당국에서 조사한 6.25전쟁 인지 여부 국민의식 조사 결과에 의하면 전국 19세 이상 남녀 1,000명 가운데 36%가 6.25 전쟁 발발 년도를 잘 모르고 있으며 특히 14.6%는 전쟁을 일으킨 것은 북한이 아니라고 하거나 잘 모르겠다고 응답한 것으로 나타났다.

이러한 때 올해로 6.25 전쟁 60주년을 맞이하여 국무총리실에 60주년 기념사업 위원회를 발족시켜 거국적으로 그리고 6.25 참전국을 대상으로 한 다양한 행사를 계획하고 준비에 돌입한 것은 참으로 시의(時議) 적절한 결정이라 하겠다.

필자는 6.25당시 고향인 강릉에서 고등학교에 재학 중이었으며 52년 초 해사교에 입학하기까지 영동지역의 6.25 개전초기 상황을 직접 목도(目睹) 했고 우리 국군이 후퇴했다가 수복할 때까지 인민군 치하에서 고초를 겪은 체험들이 아득한 기억 속에서 되살아 나기에 이때에 체험한 일들과 6.25전쟁 기간 중 겪었던 기억들을 필자 나름대로 글로 정리해 보기로 하였다.

6.25의 기억

1950년 6월 25일 04시를 전후하여 북한군의 남침이 개시 되었으며 북한군은 서쪽의 옹진반도로부터, 개성, 동두천, 포천, 주문진에 이르는 38도선 전 지역에서 지상 공격을 개시하는 한편, 강릉 남쪽 정동진과 임원진에 육전대와 유격대를 상륙시켰다.

개전 당시 동부지역 작전을 담당한 국군부대는 이성가 대령이 지휘하는 제8사단 이였다. 강릉에 사령부를 두고 2개 연대 밖에 갖추지 못해 제10연대를 38도선에 배치하고 삼척에 예비대로 제21연대를 집결 보유하고 있었다.

6월 25일 새벽에 북한군의 지상 남침과 함께 동해상에서는 무장 수송선 1척과 PT정 4척의 호위아래 발동선 30척으로 구성된 상륙선단을 이끌고 정동진 방향으로부터 옥계해상에 출현하여 즉각 상륙을 개시 하였고 이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하였다.
상륙의 목적은 38도선을 넘어 남침하는 지상군의 남진을 촉진하기 위하여 강릉에 주둔한 제8사단의 배후를 교란하는 한편, 삼척에 주둔한 제8사단 제21예비연대가 강릉을 지원하지 못하도록 차단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었다.

강릉에 주둔했던 제8사단은 강릉사수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지만 동부지역 작전을 개전 초기에 현저히 열세한 병력과 장비에도 불구하고 남진하는 북한 지상군과 강릉 남쪽의 옥계에 상륙한 적 육전대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북한군의 공격을 효과적으로 저지함으로써 동해 가도를 통한 신속한 부산 공격 기도를 좌절 지연시켜 강릉지역을 6월 27일 까지 지켜냈고 지역내의 공공기관과 국군 가족을 포함한 주민들을 피난 및 소개 시키므로서 북한군의 개전초기 작전 계획상에 큰 차질을 빗게 하였다.

당시 해군은 부산의 제2정대 소속에 소해정 6척을 배치, 동해 경비를 담당하고 있었는데 6월25일에는 YMS 509정이 출동준비를 마치고 묵호항에 정박하고 있었다. 옥계지역 해안 초소로부터 적의 상륙을 보고 받은 묵호경비부 사령관 김두찬 중령은 출동 대기 중이던 YMS 509정을 긴급 출동 시켰으며 남하하는 인공기가 계양된 포함을 발견하고 교전이 있었으나 북한군은 이미 상륙을 완료한 상태였다는 사실이 6.25 전사에 기록되어있다.

이와 같이 북과 남으로부터 협공을 받은 강릉의 제8사단은 몇일을 버티다가 대관령을 넘어 서쪽으로 후퇴해갔고 쏘제 T-34전차 수대를 앞세우고 쏘제 장총으로 무장한 인민군이 강릉을 점령했다. 이때 남진 행렬에는 쏘제 장총을 어깨에 가로 질러맨 나이어린 상당수의 유소년병들이 섞여 있었는데 소총이 너무 길어 개머리판을 땅에 질질 끌면서 지나가는 모습이 특이하게 눈에 띠었고 그 뒤로는 탄약과 보급물을 수송하는 우마차도 뒤따르고 있어 매우 이채로운 부대 행렬 이였다.

대관령 쪽으로 후퇴한 국군이 곧 다시 수복해 올 것이라는 트렌지스터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방송을 믿고 더 남쪽으로 피난가지 못한 우리 가족은 불교신자였던 부모님의 안면으로 대관령쪽 산록에 있는 보현사 절에서 한달간의 피난생활을 할 수 있었으나 더는 어려웠고 인민군은 남쪽으로 내려가고 보안서 요원들이 막고있는 길목마다의 검문도 완화 되었다기에 강릉시내 집으로 한달만에 되돌아왔다.

이후 9월 15일 새벽에 개시한 맥아더 원수가 구상하고 지휘한 인천 상륙작전이 성공함에 따라 포항과 낙동강 전선이 붕괴되고 북한군은 북으로 패주해갔고 UN군의 북진이 시작되면서 50년 9월28일 서울을 탈환하였고 동부지역에도 국군이 강릉을 거처 38선을 돌파하여 원산,함흥으로 진격해 갔고 강릉은 완전히 수복되어 경찰이 치안을 담당하는 정상생활로 되돌아 왔다.

파죽지세로 북진한 UN군은 50년 10월 25일 압록강변에 도달하고 있었으나 이날 해가 저물자 중공군은 대규모 병력으로 역습을 개시하여 UN군을 공격해왔다. 이 때문에 UN군은 공세가 좌절되고 한반도로 침입한 30개 사단의 대규모 중공군의 개입으로 “새로운 전쟁” 이 시작되었으며 UN군 전선도 다시 전략적 방어 및 철수 단계로 전환되어 혹독한 추위와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큰 희생을 감수하면서 후퇴하여 동부지역에서는 흥남으로부터 그리고 서부전선에서는 진남포 및 인천으로부터 미해군에 의한 해상 철수 작전이 실시되었다.

51년 1월 4일 지상전투상황은 중공군이 한국전에 참전한지 70일만에 38선을 넘어 서울이 중공군에 함락되었다. 이 때문에 서울시민들이 또다시 피난길에 올라야 했으니 이것이 1.4 후퇴이다.

강릉에서도 전번의 경험이 있었기에 1.4후퇴에서는 우리 온 가족들도 모두 짐을 꾸려 짊어지고 겨울철 눈길을 도보로 몇 개의 험준한 산과 령을 넘고 동해안 차로와 철길을 따라 울진까지 피난했었다. 그 후 동년 3월18일 서울을 재탈환 하면서 동부지역도 국군이 38선을 넘어 다시 북으로 진격해갔고 UN군 전선은 임진강에서부터 철원과 김화를 거처 거진에 이르는 방어선을 구축하고 있었다.

이 무렵 유엔 주재 소련대표 말리크의 휴전 회담제의가 있은 1951년 6월 24일 이후 6.25전쟁은 “일면 협상, 일면 전투”의 국면으로 접어들었고 후방은 완전히 정상화 되었다.

여기에서 인민군 치하에서 겪은 고초를 간추려 보았다.

첫째). 농작물 수확량을 일일이 숫자를 헤아려 파악하고 걷어 가는 통제된 계획 경제 속에서 경제 자유가 없어 하루 하루의 생활이 어려움을 겪었으며,

둘째). 매일 각 가정마다 강제 인력 동원으로 무보수 노역을 강요 당했고,

셋째). 각종 지시와 계획에 어긋나는 언행이나 비판을 공개적으로 할 수 없고 몰래 했더라도 자칫 밀고를 당하면 바로 반동으로 몰려 즉각적인 가혹한 처단을 받게 되었고,

넷째). 각 동사무소마다 민청 조직이 구성되어 주민을 조직화하고 주야간 동사무실에 모이게 하여 끊임없이 불러대는 “김일성 장군의 노래”가 주변에 울려 퍼지게 하였고,

다섯째). 주민 동향을 감시하고 지역 간 이동이 부자유한 억압된 생활 이였으며,

여섯째). 많은 수의 우익 인사와 무고한 양민이 학살 당했고 일부는 납북 당해갔다.

위와 같은 인민군 치하에서 겪은 체험들은 오늘날 민주국가에서 누리고 있는 자유와 시장 경제 자유가 얼마나 고귀한 것인지를 우리에게 확실하게 인식 시켜주었다.

필자는 51년에 학업을 계속 하던 중 동위원소 및 화학방정식에 매료되어 장래 화공학을 전공해 보려는 꿈을 갖고 있었다.그러나 6.25 전쟁의 참상을 입은 당시의 사정으로는 대학진학의 장래를 가늠하기 어렵게 되어 이 꿈을 접고 전시임에도 불구하고 4년제 교육을 보장한다는 해사교 사관생도 모집광고를 보고 이에 응시 합격하여 해군의 길을 걷게 되었으며 6.25전쟁은 필자의 운명도 바꾸어 놓았다.

해사교 입교와 생도시절

합격통지를 받고 52년 2월 28일 소집일 까지 진해로 가야 하는데 전시에 교통수단이 없어서 북에서 부산 쪽으로 내려가는 군용트럭을 얻어 타고 새벽에 강릉을 출발했다. 동해안 국도를 따라 삼척,포항을 거처 저녁 해질 무렵에 경주 북쪽 어느 시골길을 경유하게 되었는데 산악 길로 들어서자 경찰지서 앞에 도로 통행을 차단하는" 배리케이드"가 가로 막고 있어 차를 멈추었는데 지서 순경이 나와 전방 산속에 패잔병 공비가 준동하고 있기 때문에 주간에도 백색기가 계양되야 통행이 허가되고 적색기가 계양되는 시간에는 통행이 금지되며 특히 일몰과 동시에 야간 통행은 완전히 차단된다고 말하는 것 이였다.

그러나 전방에서 내려온 칼빈 소총으로 무장한 젊은 군인 수명이 오기로 "배리케이드"를 치우고 막무가내로 통과해서 어둑어둑한 산길로 접어들었는데 전방에서 어둠을 가르는 요란한 신호탄 총성이 불꽃을 발하며 하늘로 치솟자 이를 목격하고는 군인들도 위협을 느꼈는지 차를 되돌려 지서가 있는 마을로 돌아와 시골집에서 하루밤을 자고 다음날 아침에 출발해서 부산에 도착하고 다시 진해로 가는 군용 트럭을 얻어타고 안민고개를 넘어 산 정상에서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게 내려다 보이는 옥포만에 위치한 해사교에 도착하였다.

소집일인 52년 2월 28일 해사10기생으로 합격하여 소집된 인원수는 112명이였고 이들은 서울, 대전, 대구, 광주, 부산, 진해, 묵호, 전국 주요도시와 해군경비부 소재지에서 시험을 보았는데 해사 10기생도 모집에 총 3,500여명이 응시하여 30대1의 경쟁을 뚫고 최종적으로 확정된 합격자들이였다. 연령대는 29년생부터 35년생까지 7년 차이의 선후배 들이 였으며 개인 경력 배경도 대학졸업생, 교사, 군인, 고교졸업생 및 2년 수료자등 다양한 직업과 학력의 소유자들이어서 전시의 다급했던 당시의 사회 상황을 잘 보여 주는 것 이였다. 2차 신체검사와 한달간의 특별 훈련을 마치고 4월6일 입교식을 갖게 되었으며 가입교 기간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정규사관 생도로서 입교선서를 한 인원은 107명이였다.

이들이 4년 후 졸업임관 할 때는 77명(해군65, 해병12)이 해군(해병) 소위로 임관(이학사학위 취득)하였으며 이후에 이들중 장성10명(해군9,해병1)과 박사학위 취득자 7명(국내3,외국4)을 배출하였다. 필자는 현역근무중 서울대에서 경영학 석사학위를,예편후에 경희대 대학원에서 경영학 박사학위를 취득하므로서 군인의 길과 만학으로 이룬 학문의 길에서 작으나마 두가지 영예를 성취했다.

이는 지금에 와서 뒤돌아 보면 60년전 6.25전쟁의 참화속에서 보낸 강릉농고의 재학시절이 떠 오르며 그 당시 전란을 겪는 어려움 속에서도 비록 시골학교 였지만 수준높은 학문적 기초를 딱고 학문적 열의를 품게 해주신 모교 은사님(최용근 교장,남규욱 교감,서병소 농학,황금찬 국어,조순 영어,최재하 수학.물리,정익교 수학,김동춘 임학,강대윤 화학,조익현 수학,윤명 국어)들의 덕분이라 생각되여 늘 감사한 마음과 모교에 대한 애착 그리고 자부심을 간직하고 있다.

해사교에 입교하여 졸업 할 때까지 필자 나름대로 특별히 생각나는 것 몇 가지를 적어보겠다.

1).“빛내자 해사전통, 받들자 충무정신”의 표어와 “진리를 구하자, 허위를 버리자. 희생하자”라는 교훈은 이 충무공의 철학과 정신이 고스란히 담긴 것으로 엄숙하고 신선한 느낌을 주었다.

2).그 당시 우리 해사교는 벌써 100년을 앞서간 1845년에 창설,개교한 미국 Annapolis 해군사관학교로 부터 모든 학제와“컬리큐럼”을 그대로 받아 드렸기에 영어원서로 된 이공계 교제로 수준 높은 교육을 받을 수 있었다.교수진도 천문항해 김시중교수, 수학 김병수 교수, 체육 김오중 교수, 구면삼각 이용두 교수 등 당시 일반 대학못지 않은 훌륭한 교수진을 갖추고 있었다.

3).미해군 인사참모부 발행 Naval Orientation(NAVPERS 16138)은 해군 예절과 관습, 계급, 군기, 함승조원의 직책과 책무,해군함정의 형벌, 특색 등 해군을 소개하고 쉽게 이해하는데 매우 적합한 교재 내용이었다.
여기에 담겨 있는" Naval etiquette,custom,그리고 protocol"은 우리들 평생에 잊혀지지 않는 규범이 되였다.

4).“도별담을 하지 말자”는 구호는 오늘날 우리가 겪고 있는 극심한 지역갈등에 비추어 볼 때 참으로 선견지명이 있는 구호였다.

5).일제 9.9식 소총에서 MI소총으로 개인 병기의 변경, 정복은 7개 단추의 매미 복장에서 신사복으로 복제 변경이 있었다.

6).하계 수영 훈련 중 옥포만 앞으로 멀리 바라보이는 남도와 송도를 왕복해 돌아오는 10,000M 원영이 1학년 때 한번 있었고 그 다음 해 부터는 토끼섬을 왕복하는 5,000M 원영으로 단축되었는데 필자는 수영1급으로서 이 10,000M 원영을 대형 선두에서 아침 8시30분경 출발하여 오후 2시경 돌아온 기억이 난다.

7).1953년 초에 동해 UN연합함대에 편성되어 작전하고 있던 우리 해군함정에 실습생도로 2차에 걸쳐 2개월간 승함 하였기에 해사 10기생 모두가 6.25전쟁에 참전한 영예를 얻었다. 보다 자세한 것은 다시 후술하겠다.

8).1955년 6월 15일부터 7월 13일까지 28일간의 졸업원양 실습은 진해-필립핀(마닐라)-홍콩-진해를 PF2척(65.66함)과 AO-1척으로 실시하였다.

9).벚꽃이 만개하는 날을 예측한 1956년 4월 10일에 이승만 대통령 및 동령부인, 정부요인, 미해군7함대 사령관, 주한 외교 사절 등 다수의 VIP가 참석한 가운데 졸업식을 갖었다. 당시에는 대통령이 직접 임석해서 임관하는 초임장교와 일일이 악수를 나누면서 충성심을 고취시켜 주었다.

그런데 근래 언제부터인가 육해공을 해마다 한번씩 번갈아 참석하는 제도로 바뀌어 대통령이 참석하지 않는 졸업식은 엄숙함이 많이 사라졌고 4년간을 마치고 임관하는 사관생도들의 충성선서도 좀 맥이 빠진 듯한 느낌이 든다. 4년제 3군 사관학교 졸업식만은 매년 국군통수권자인 대통령이 직접 참석해서 임관하여 임지로 떠나는 초임장교들에게 국가에 대한 충성심을 고취 시켜줄 수 있도록 제도를 다시 바꾸었으면 한다.

생도시절의 6.25참전

1953년 1월 28일부터 2월 28일까지 1개월간 해사 10기생은 한국 해군의 PF61함과 63함에 승함하여 동해 UN연합 기동함대에서 일본을 왕복하는 보급선들을 호송하는 한편 원산, 성진, 청진 등지의 앞바다를 경비 하는 해상작전에 참전하였다. 10기생이 귀교한 직후 학기제가 변동되었기 때문에 1차 실습이 끝난지 불과 1개월여 만에 다시 2차 실습을 떠나게 되었다. 실습기간은 1953년 4월 5일부터 1개월간 실시했는데 이때는 8기생 선배들과 같이 승함 하였고 함정은 PF61,63,64,65함에 분승하였다.(자료:해사교 평가관실)

이렇게 전시에 함정 실습을 2번씩이나 실시한 특이한 경험을 갖게 되었고 이때의 함상 실습에 참가한 해사 10기생 모두는 1953년 7월1일부로 영예로운 6.25종군 기장과 UN군 종군기장을 동시에 수여 받았고 해군 복무기록에 기록되어있다. 그간 보훈처에 6.25 참전용사로 등록되어 있다가 지금은 2008년 9월부터 국가 유공자 법령으로 개정됨에 따라 종전의 6.25참전 용사증은 국가 유공자증으로 바꾸었다.

미해군 극동함대가 6.25전쟁에 참전했던 당시 상황을 살펴보면 1950년 6월 27일 UN안전 보장이사회에서 대한민국 군사원조안이 의결되자 세계로부터 자유국가들이 이에 호응해서 그들의 함정들을 대한민국을 위해 계속 한반도로 출동시켰다. 이에 따라 미극동 함대 사령부에서는 이들 함정으로 UN연합해군부대를 편성, 해상작전을 전개하게 되었는데 그 구성체의 대부분은 미해군 함정들이였다.

한국 해군이 예속되어있던 기동부대 편성을 보면 TG95(봉쇄 및 호송부대)예하에 TG 95.7 이 한국 해군 이였다. 한국해군 기동전대인 TG 95.7은 TG 95.2 (동해안 기동전대)와 합류 기동하면서 동해상에서 연합해상작전에 임했다.

원산 앞에 있는 려도(麗島)에는 영국해군 특공대, 미해병대 및 한국해병대가 각각 교대로 점령하고 있었고 한국 해병대가 점령한 동해안 의 도서들은 고저(庫底)근해의 란도(蘭島), 성진 근해의 양도(洋島)등이 있었으므로 한국해군 PF함정은 보급선의 호송임무 외에 때때로 원산과 성진 앞에 한국해병대가 점령하고 있는 섬을 적의 상륙으로부터 방어하기 위해 해상초계에 차출되기도 하였다.

결언

1950년 6.25일 새벽 4시 개전 이래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유엔을 대표한 해리슨 미육군 중장과 북한측의 남일이 판문점에서 마주앉아 휴전 문서에 서명함으로써 5조 63항에 달하는 정전협정이 조인되었다. 이것은 전쟁 발발 후 3년 1개월 2일, 날수로는 1,127일만의 일이였다.

6.25전쟁의 인명피해는 한국군과 연합군의 사상자, 포로, 행방불명을 합쳐서 약 99만 6천명, 중공군과 북한군은 약1백42만명으로 남북쌍방의 사상자 수를 합치면 약 2백40만명이라고 집계되고 있다. 이 희생자 수는 일본군이 2차 대전에서 희생된 2백50만명의 참화에 필적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6.25 개전 초기에 맥아더 원수을 한국전선으로 보낸 즉 미군의 참전을 결단하고 명령하였던 해리 S 트루먼 미대통령이 우리 민족의 생사 갈림길에서 우리 민족을 구해 주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오늘의 우리들은 잊지 말아야 한다.

더불어 우리가 특히 기억해야 할 것은 대한민국의 운명이 바람 앞의 촛불처럼 위험에 처했을 때 “잘 알지도 못하는 나라, 만나 본적도 없는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미국의 젊은이 들이 연150만명이나 한국으로 파병되어 5만 4천명이 전사한 혈전을 치르고 10만 이상이 다친 미국을 위시한 16개 참전국의 지원과 희생이 있었기에 6.25 남침을 저지 할 수 있었고 한반도의 공산화를 막아 냈으며 그 속에서 오늘날의 자유 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체제를 가춘 대한민국이 존재, 번영 할 수 있었다는 역사적 사실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판문점이 상징하고 있는 바와 같이 “전투는 끝났지만 전쟁은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60년이란 세월이 흘러갔다. 그간 북한은 핵으로 무장했고 2012년을 강성대국 완성의 해로 목표를 정하고 있는 반면, 우리의 현실은 어떠한지? 6.25전쟁의 잿더미를 딛고 일어서서 산업화 사회로 발전을 이룩했지만 그 처절했던 6.25전쟁의 참화는 옛날 일로 까마득히 잊어버리고 있지 않는지?
전술한 국민의식 조사결과를 보면 전쟁 재발의 위험에 얼마나 국민적 단합으로 대비를 할 수 있을 것인지 우려를 금할 수 없다.

전쟁 재발을 방지하기 위해서는 한미동맹의 강화와 현제의 한미연합사 체제를 그대로 유지하여 북한의 비핵화를 실현하고 감히 무력 도발을 꿈꾸지 못하도록 힘의 우위를 확보하는 것만이 동족상잔의 비극과 막대한 희생을 막는 가장 높은 차원의 억지전략임을 국민 모두가 철저히 인식하고 특히 2012년 4월 17일로 예정된 한미 양국 간의 전시작전 통제권 전환 문제는 원점에서 재검토 하거나 시점을 연기해야 할 것이다.

그 이유는 6.25전쟁이 일어난 가장 큰 원인으로 주한미군이 철수하고 한미동맹도 없는 상태였기 때문이라고 분석하고 있다.

오늘날 핵을 보유하고 6.25때 보다 더 강력해진 북한을 상대하여 현제의 전시 한,미지휘체계를 분활하고 한,미연합사를 해체한다는 것은 평시의 전쟁억지력도 전쟁재발시 승리도 보장할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24회 김연식
예비역 해군준장


첨부:(1). UN군 종군기장 및 6.25참전 종군기장.
(2). 참고자료(6.25참전 유공자 생존현황).




(1). UN군 및 6.25참전 종군기장: 진해 해군교육사령부 부대역사관에 기증(필자는 제23대 해군교육단장 역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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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N군 종군기장 6.25참전 종군기장


(2). 참고자료: 6.25참전 유공자 생존형황

2010년 5월말 현재 생존 6.25참전 유공자는 23만5,037명,
작년말 까지 생존자는 24만1,583명, 불과 5개월만에 6,546명 사망,
참전용사들의 평균연령은 이미 80세를 훌적 넘은 상태,

우리나라 국민의 기대수명은 80.1세 임으로 그들이 이 사회에서 살아지는
속도는 앞으로 훨씬 더 빨라 질수 밖에 없다.

전쟁의 참상을 직접 보고 듣고 겪었던 참전용사들이 건재하고 눈을 부릅뜨고 있는데도 이념과
이해관계에 따라 전쟁의 진상을 왜곡하는 사례가 비일 비재한 것이 오늘날 우리 모습이다.

그들이 사라진다면 누가 있어 그날의 진실을 증언해 줄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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