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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준홍 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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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권 오 원 작성일 2010-10-19 17:32 댓글 0건 조회 1,764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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權俊洪 회장
                                                       
금년 추석에 성묘를 마치고 어머님 댁에 들였을 때 어머니께서 며느리와 함께 정성스럽게 차려주신 점심상을 어머니와 며느리 그리고 권회장 형제와  함께 할 수 있었던 것은 아주 큰 즐거움이였다네. 당초에는 화요일에 가려고 했던 성묘가 갑자기 일이 생겨 목요일로 늦추었었는데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 처럼 일이 그렇게 잘 되었었다네.

순백純白의 밥그릇에 담긴 기름이 자르르 흐르는 샛노란 차조밥에, 귀한 송이를 듬뿍 넣은 송이버섯 국을 비롯한 정갈하기 이를데 없는 솜씨 좋은 반찬에는 어머님의 마음 씀씀이가 그대로 짙게 배어나서 수저匙箸를 들기도 전 부터 군침이 돌고 배가 불러 왔으니… 서로 알고 지난지도 수수십년이 되지만 이렇게 다섯 사람이 한 상에서 함께 식사를 한다는 게 어디 그리 쉬운 일인가? 오래 오래 기억될 점심이였네. 더군다나 점심상에서 오고간 권회장 형제와 어머니의 재미나고 귀한 얘기는 금상첨화錦上添花였다네. 어떻게나 재미있던지 나는 점심을 마치고 후식을 즐기면서 들던 커피잔을 뒤 엎을 정도였으니…

내가 沙川 집에 들릴 때 마다 가슴 뭉클한 진한 감동을 받는 것은 집 주인인 어머니께서 집을 그렇게 알뜰하게 잘 가꾸어 찾는 사람들을 언제나 기쁘고 즐겁게 해 주는 일인데, 다름아닌 꽃 가꾸기와 정원수 다듬기가 바로 그것이라네. 그래서 나는 어머님 댁을 “꽃속에 피어난 꽃집”이라고 부르는데, 이른 봄 부터 늦 가을까지 형형색색形形色色의 크고 작은 꽃들이 경쟁하듯이 피어 마치 경염競艶대회라도 치루는 것 처럼 찾는 이들의 눈을 즐겁게 해주고 또 마음을 어루만져 주기 때문인데, 세상에서 꽃을 좋아하는 사람쳐놓고 나쁜 사람<惡人>이 없듯이 나누고 베품을 즐기는 사람쳐놓고 속이 시꺼먼 사람이 있던가. 더군다나 소나무를 비롯한 여러 종류의 상록수들과 어머니께서 시집오기 전부터 그 자리에 그렇게 우뚝 서 있었다는 100여 년은 훨씬 지났을 백일홍百日紅 나무를 비롯한 크고 작은 각종 화목花木들이 꽃 사이 사이에 알맞게 자리를 하니 꽃들의 됨됨이를 한층 더 돋보이게 하지 않던가. 집안에 들어서면 집안대로 구석 구석이 온통 꽃 꽃 꽃으로 치장을 했으니…!

쥐면 터지랴, 불면 날아갈랴, 금지옥엽金枝玉葉이 따로 없듯이 손에 물이라고는 한방울도 묻히지 않고 곱게 곱게 자란 열여덟살의 처녀가 어느날 부모님들끼리 정혼定婚한 배필配匹을 찾아 시집을 온 곳이 강릉시 사천면 方洞里 가맷골<釜洞>의 안동 권씨 대사성공파大司成公派 종파宗派의 종가宗家인 4남 3여의 맏며느리가 아니였던가. 지금 사시는 이 집 터가 바로 그 집 터였고. 일꾼을 두 사람이나 두고 농사를 지어야 하는 대농大農에, 권회장 형제들이 태어나니 5대가 한집에 살아야하는 층층시하層層侍下의 시댁 어른에, 밤 하늘의 별 만큼이나 많았던 제사, 차례, 생일, 전사, 일가친척의 대소사大小事에, 시동생 시누이들의 혼사에, 어디 한시라도 손이 마를 날이 있었으며 어디 한시라도 다리를 쭉 펴 볼 틈이나 있었겠는가. 이런 종가에 종부宗婦로 자리매김한다는 것은 온갖 신산辛酸을 겪으면서 그 신산을 의무감처럼 이겨내고 견뎌내야 하니 득도得道의 경지에 오르지 않고서야 가능한 일이겠는가.

내 어릴적 기억으로는 ‘ㅁ’자로 된 고래등 같은 기와집 안에 있었던 우물은 부엌에서 대각선으로 20여보步 쯤 되었었는데, 우물이 너무 깊어 두레박질을 해야 했지만 두레박질이 태어나서 평생 처음 해 보는 일이라 얼마나 설었겠는가. 깊은 우물이니 물이 제대로 보이기를 하나, 두레박은 물에 닿는대로 꺼꾸로 쳐 박혀야 물을 담는데 쳐 박히기기는커녕 배처럼 뜨기만하니… 겨우 겨우 물을 채운 물동이를 머리에 이자니<얹자니> 물동이 따로 또바리(또아리) 따로, 마음 따로, 몸 따로, 머리 따로, 발걸음 따로 온 몸이 제 각각 따로 따로 노는데… 겨우 겨우 채운 물동이를 머리에 이고 한 발자국 옮기면 물동이 안의 물이 이쪽으로 출렁, 또 다른 발을 옮길라치면 물동이 안의 물이 저쪽으로 출렁, 출렁거리는대로 물이 주룩 주룩 흘러내리니… 간신히 간신히 부엌에 이를 때 쯤이면 물동이 안의 물은 거의 반이나 쏟아져 내려 머리에서 발끝까지 온통 목욕을 시킨 후 였을 테니… 이런 밍구스러움을 어떻게 수습하셨을까.

일반적인 이야기이지만, 몸으로 때워야하는 시집살이는 마음으로 겪었을 고생에 비하면 덜 고통스러웠을거라는 짐작인 것이 가장 흔한 예가 예로부터 고부간姑婦間의 관계인데, 고부간은 좋지 않은게 정상적일 정도로, 집집마다 아주 특이한 차이를 감안한다하더라도, 늘 물과 기름의 사이였다는 것이 대체적인 시각視角이였고 또 상식이지 않았던가. 고부간의 관계를 정신분석학자나 심리학자 같은 전문가들은 남녀간의 경쟁, 대립, 갈등으로 보는데, 말하자면, 시어머니와 며느리라는 여자의 입장과 시아버지와 아들이라는 입장의 차이에서 생기는 경쟁관계에서 오는 갈등과 알력軋轢으로 보더군. 그래서 심한 경우는 과부의 외아들이 장가를 들면 한 남자<아들>와 두 여자<시어머니와 며느리>의 경쟁적인 싸움이기 때문에 별 별 희한한 이야기를 많이 생산하지 않던가. 어디 이 뿐이 겠는가? 시누이나, 시동생이나, 또 친인척들과의 관계도 늘 살얼음 위를 걷듯이 조심 조심 또 조심해야 하지 않았겠는가.

화병火病이라는 병은 가장 한국적인 병인데 “hwa-byung”이란 이름으로 미국 의학회에 정식으로 등록된 병명病名이라잖는가. 지금의 관점으로 보면 스트레스<stress>가 쌓이고 뭉친 결과라고 할 수 있겠지만 옛날 한국 어머니들이 어디 이를 풀 길이 있었겠는가. 고작 한다는 게 애꿎은 강아지 배때기를 걷어찬다던가, 부지갱이로 때린다던가, 제 자식들의 볼기짝을 때린다던가 또는 필요이상으로 오래 야단을 친다던가, 솥뚜껑을 깨지지 않을만큼 요란스레 들었다 놨다 한다던가, 멀쩡한 바가지를 깬다던가 하는 정도로 화풀이를 하지 않았겠는가. 이렇게라도 화풀이를 할 수 있었던 옛 한국 어머니들은 스트레스를 푸는 방법을 체득하신 선각자先覺者들이 였으니 그나마 다행이였지만, 이런 어렵고 모진 시집살이를 어떤 방법으로던지 풀지 못하고 그저 마음 속에 차곡 차곡 쌓기만 하고 사셨던 분들은 나중에 화병으로 이어지지 않았을까.

어머니라고 왜 시댁 식구들과 이런 저런 갈등을 겪지 않았겠는가. 그렇지만 원체 입이 무겁고 또 온화하고 너그러운 타고난 성품性稟에 어릴적부터 익힌 꽃을 사랑하고 아끼는 고운 마음씨가 이런 시집살이를 이겨내게 했을 터이고, 더구나 본인은 종가의 종부의 지위에 언젠가는 올라야 한다는 숙명적인 자부심이 이를 견뎌야 한다는 의무감으로 연결되었을테고, 또 친정의 체면을 보아서라도 무조건 참고 참아야 하지 않았겠는가.

위의 물길어 나르기 이야기는 지금 살아계시는 8.90대 한국 어머니들이 젊었을 시절 겪었을 고역담苦役談의 한 토막이지만, 어머니께서 점심상에서 이런 이야기를 하신 것은 당시로서는 며느리로 반드시 통과해야하는 통과의례通過儀禮이긴해도 거기에 담긴 뜻은 아주 크다고 생각되는 것이 하나에서 열가지를 참고 또 참아내야 했던 것은 오로지 집안을 위하고 또 자손들을 위한 일념一念이 아니였겠나. 이런 선대先代들의 공덕功德으로 후손들은 지금 같은 호의호식好衣好食을 누리는 것일 테고…

(나는 어미님을 뵐 때 마다 어머니께서 뭔가 늘 주지 못해 애쓰시는 모습은 마치 출가한 딸이 친정에 근친覲親 갔을 때 친정 어머니가 딸에게 뭔가 자꾸 자꾸 더 주지못해 애쓰시는 그런 모습을 보는 것 같다네. 이번만 하더라도 힘들고 어렵게 주어 모아 두었던 알밤을 내 배낭背囊에 더 많이 넣어 주지 못해 얼마나 애쓰시던가!) 

옛 기와집은 집이 너무 큰 탓이였겠지만 집 뒤에 있는 크고 너른 대밭竹田만하더라도 바람조차 지나다닐 틈이 없을 정도로 빽빽했기 때문에 사랑채만 빼고 집이 대체로 좀 우중충했었다는 나의 어릴적 기억인데, 그런 집을 헐고 집터를 4-5m 높혀서 냉난방을 포함하여 모든 편의시설을 제대로 골고루 갖춘 날아갈듯한 지금의 집을 새로 지었으니, 유행가에 나옴직한 “저 푸른 초원위에 그림 같은 그런 집이 아니던가.” 집 주위의 사방은 옹색하지 않고 넉넉하게 자리를 한 탓으로 좋아하시고 아끼는 나무와 꽃들을 사방으로 사시사철 가꾸고 계시지만, 한장씩의 큰 통유리로 장식한 동남향東南向과 서남향西南向의 너른 응접실에서 이 가을 햋볕이 잘드는 어느날 오후에 시원스레 탁 트인 밖을 내다 보시면서 옛날의 이런 저런 일들을 더듬노라면 3년전에 사별死別하신 부군夫君 생각이 왜 간절하지 않겠는가. 아무리 자식들이 온 정성으로 잘 모시고 떠 받든다고 하더라도 말이네.

사람이란 어릴 때 어떤 환경에서 자랐느냐 하는 점이 어른이 된 후에 사회생활을 어떻게 할 수 있는지에 직결된다는 것이 대부분의 심리학자들의 공통된 견해인데, 자유당 시절에 강원도 도의원을 지내신 권회장 외할아버지는 전문가 수준을 뺨치는 원예 전문가였었다고 하니 어머니는 친정 아버님의 꽃을 아끼고 사랑하며 정원수를 몸소 가꾸는 마음씨를 그대로 쏙 빼 닮지 않았나하는 짐작이라네. 이렇게 자란 어머니이니 지금도 그 고결高潔한 아름다움을 그대로 간직하시려고 많이 애 쓰시던데, 사실, 종부로서 지녀야하는 예의법절禮儀凡節에 종가의 법도法道를 흐트러짐이 없이 그대로 간직하기가 어디 그리 쉬운 일이겠는가. 지금이 어떤 세상인데… 더군다나 벌써 80대이시니 자신은 종부의 마지막 보루堡壘라고도 여기지 않겠는가.

꽃을 사랑하고 아끼는 고운 마음씨에 나눔과 베품을 생활화 하신 한 종가의 전통적인 종부의 역할을 마지막으로 하게 될 金南淑女士! 훌륭한 분이시네.

2010년  10월 19일
서울에서  權 五 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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