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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십년만의 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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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함금식(32회) 작성일 2011-11-05 12:52 댓글 0건 조회 1,738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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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일 전에 보스톤에 사는 손자들을 볼겸 하여서  새벽에 차를 몰고 나섰다.
한 여덟시간을  넘게 운전 하여야 하는 거리라 새벽 일찍이 떠났다.  고속도를 운전 하면서 이것 저것 생각하다 보니, 몇일전 한국에있는 동기 한분과 통화를 한 생각이 났다.

헤어진지 반세기가 지나서 얼굴도 기억이없고 이름만 기억이 나는 동기로 부터 전화를 받았다. 그 와는 중학교때 부터 같이 다닌 기억이 난다.나는 강릉중학 3학년 3반이였고, 그는 4반이였던겄으로 기억한다. 공부를 잞하는 친구였었는데 농고 입학식에 갔더니 뜻밖에 그가 축신과로 왔다고한다. 나는 임과로 왔으니, 나는 나대로 임과 학생들이 실력이 더 낳지하는 자부가있었는데, 그가 축산과로 왔다니 나를 다시 한번 보게되었었다. 무었인가 내가 모른는 어떤겄이 숨겨저있지 않나 하는 생각도 갖었었다. 임과를 내가 원해서 온것이 아니라 숙부님이 일정시대에 영립서에 좀 관계된일을 해서인가 나를 임과로 가라고해서 택하게 된것이니 나는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헤여진지가 오십년이 넘었는데, 전화를 들자 마자, 야 자 옛날처럼 막말로 대화를 나누게 되었다. 이렇게 누구와 야 자 반말로 얘기 햬 본적이 한국 떤난지 43년만에 처음이다. 이야기는 옛날 함께 꿈을 쌓던 모교에대한 이야기를 기억을 더듬어 가면서 이야기를 하였다. 그는 축산과를 졸업하고  공대에가서 기술자가 되면 취직이 잘 된다기에 그 분야를 택했으나 수학과 특히 물리학에 다른 학생들 특히 명문 인문고에서 온 학생들에 비해서 떨어 지기에 그 수준을 마추기위해서 물리학이나 고급수학을 독학으로 공부하여 학년이 올라 감에 따라서 그들을 앞서게 되었다고 했다. 그는 그러한 결과로 오늘 한국에서 해양 조선 중공업에서 굴지의 엔지니어(engineer)의 지위를 갔고 얼마전에 은퇴를 하였다고했다.

나도 마찬가지이다. 나는 사회과학을 공부 했기에 통계학을 잘 할수있으면 족한 정도로  확율수학을 하면 되었다. 그러나, 박사학위를 할려면  제2 외국어를 하여야 하기때문에 독일어를 하게 되었다.  모교에서는 독일어를 배울 기회도 없었거니와 수학은 일반수학도 제대로 못 끝난것 같은 기억이다. 삼각함수나 기하는 일반적으로 측량을 배워야 하니 어느 정도는 배운것 같다. 그러나 미국에와서 제대로 기반을 잡은것 같다. 그러나,독일어를 나는 독학을 하게 되었다. 외국어를 혼자서 공부 한다는겄은 쉬운일이 아니다. 그래도 박사학위 자격 시험에서 Immanuel Kant 의 실천이성 비판논(die Krtik der praktischen Vernunft)의 한 장(chapter)을 영어로 번역하라고 주었기에 겨우 겨우 번역을 하여서 전공분야의 시험성적들을 합하여 무난히 통과를 보게 되었었다.

우리 둘은 이러한 지나간 옛일들을 얘기하면서 고등학교의 교육 기반이 아주 중요하다는것을 재삼 상기헤계되었으며, 고등학교때의 교육이 대학의 교육보다 더 중요하다는겄에 합의를 보았다. 그뿐만 않이라 고등학교에서 서로 사귀는 친구들이 대학에서 사귀는 친구들보다 더 정이있고 숨김없이 우정을 나누는 친구들이 된다고 서로 의견을 나누었다. 사실상 지금 뒤 돌아보면 대학교의 친구들은 몇 사람 뺂고는 별로 기억 할만한 추억이 없다. 거기에다가 대학을 다닐때에도 장학금을 받아 공부는 했지만, 먹고 살 자리는 벌어야 하기에 언제나 바뿐 생활로인해서 같은 과의 동기라 하더라도 별로 친할 시간적인 여유가 없었다.

43년전에 미국에 왔을때, 한국학생들을 만나게되면, 나는 기가 죽을때가 종종 있었다. 그들과 인사 상통을 하고 나면, 고등학교 얘기가 나오기가 대부분이다.곧 그들은 지례 짐작으로 자기들의 배경에 비하여서, 함형은 경기를 나오셨나요 라거나 그렇지 않으면, 경복을 나오셨나요 라고 서을의 일류 고등학교 이름만 내 놓는다. 그것도 그럴수밖에 없는것이 그 당시 유학을 온 학생들의 대부분이 서을의 명문고 출신 들이였다. 집안도 쟁쟁한 집안 출신이였다. 어떤 사람은 국회의장의 아들이요, 어떤이는 무슨 장관의 자제요하는 배경들을 가지고있었다.그럴때 나는 “아니요, 나는 가릉농고를 나왔읍니다.”라고 대답을하면, 약간 의아해 하는 친구들이 많았다. 무슨 대답을 할수없언던가 그들은 “강릉농고, 축구 잘하는 학교이지요.”라고 말하고는 대화의 강도가 약해진다. 그 후부터는 서로들 사귀려면, 조심있게 공통적인 관심사를 찾아가면서 친해야 되기 때문에 친구로 사귀는데 부담감이 갈때가 많았다.

한편 그 친구들과는 사회 계층적인 배경들이 너무나 다르기 때문에 대화를 터볼려고 노력을 하여 보아야 오히려 꺼치러울때가 많기에 그저 교정에서 만나면 눈인사를 하는 관계를 유지 하는겄이 편하다고 느꼈었다. 나는 대학원 연구조교 생활을 하면서 학비를 면제 받고 장학금을 받아서 쪼개 가면서 생활을 해야 했었지만, 어떤 분들은 그 당시만해도 한국의 부모들에게서 학비와 생활비를 받아 가면서 공부를 하는 학생들이였다.

사람들이 서로 사구며 우정을 쌓으려면 상호 공통적인 경험이나 나눌스있는 관심들이 았어야한다. 이러한 삶의배경에서 대상을 보고 느끼고하는 유형의 기반을 우리는 의식이라 부른다. 그래서 서로 모르거나 오래 떨어저 있었던 사람들이 한자리에 모였을때 상통하는 의식이 있게되면 사긤이 쉽게 되는 겄이다.
이러한 공통 의식을 갖게 되는데는 사람들이 자라나는 사회 계층의 배경이 중요한겄이다.

이 동기 친구와  나는 오십년이 넘게 떨어저있었고 그동안 대화를 한번도 나누어 본적이 없었지만 서로가 야 자 반말로 웃으며 지나간 오랜 세월을 애기 할수있었던것이야 말로 우리가 모교에서 서로 공통적인 경험과 사귐이 있었기에 즐겁게 마음을 털어 놓고 대화를하여 앞으로 만날수있는 기회가 마련되었다고 생각했다.

우리 모교가 이제 방향을 다시잡아서 들어오는 젊은 학생들에게 누구에게나 떨어 지지않는 고등하교의 교육을 마련하는 터전이 되어 지기를 바란다.그리하여서 한국에서 굴지의 고등학교로 발전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콘네티커트(Connecticut)를 들어서서 눈발이 내리더니 마사추세트(Massachusetts)를 들어 서니 하늘도 맑아젔고 눈도 제법 쌓여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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