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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첫 전승,춘천지구 방어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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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24회 김연식 작성일 2013-07-04 22:34 댓글 0건 조회 2,875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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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6월22일 춘천 수변공원에서 10시30분 부터 시작한 조정환 육군총장이 임석하고 2군단장이 주최한 개회식 행사와 6.25전쟁 첫 전승,춘천지구 방어전투 재연행사에 초청을 받아 참가 하였읍니다..

30분간의 개회식 행사 후 한편의 전쟁 드라마를 보는 듯, 전차가 동원되고 국군과 춘천 시민, 북한군으로 분장한 인원들이 63년 전의 전투사항을 관람석 앞에서 실감나게 전투장면을 재연한 행사를 감동 깊게 지켜 보았고 이후 2군단장이 주최한 참전용사 위로연에도 참석하였읍니다.

춘천지구 방어전투는 낙동강지구전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전쟁의 승패를 가름한 3대 전승으로 평가 받고 있읍니다.

그 이유는 개전초기에 춘천,홍천지구방어전투에서의 승리로 적의 진격을 3일간이나 저지시킨 것이 서울을 빼앗긴 국군의 주력부대가 수원 이남에서 춘전,홍천지구를 돌파하고 진격한 적에게 포위,섬멸되는 것을 막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교의 13회 졸업생인 조정연 장군(87세)께서 춘천 전방의 38선 방어를 담당한 6사단 7연대 작전장교(당시 육군대위)로 근무하다가 6.25전쟁이 발발 했는데 전차를 앞세워 남침하는 적과의 전투에서  대 전차무기가 없었던 당시 사이다 병 정도의 작은 병에 석유를 넣어 불을 붙여서 전차 엔진에 던 저 전차를 불 붙게 하거나 육탄으로 적 잔차와 맞서 부상을 당하면서 피 흘려 싸운 우리 모교의 원로 선배님이 한 분 계신다는 것을 동문들에게 알려 드립니다.

또한 80세 이상의 선배님들도 다른 지역전투에서 6.25전쟁에 참전 하셨습니다. 공산침략을 물리치고 오늘의 대한민국을 지킨 6.25참전 원로 선배님들에게 경의를 표하고 건강 하시기를 기원합시다..

호국보훈의 달, 6월을 보내면서 “6.25전쟁 첫 승, 춘천지구 방어전투”에 대한 전쟁사를 당시를 잊지 않고 기억 하기 위해 후배들에게 여기 게시판을 통해 소개합니다.

6.25전쟁 첫 전승, 춘천지구 방어전투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김일성은 한반도를 공산화하기 위해 기습적인 무력남침을 감행했다. 6.25전쟁은 스탈린의 승인과 모택동의 지원 하에 감행되었으며, 남한 내 좌익세력이 봉기할 것이라는 김일성의 잘못된 판단이 침략을 부추겼다. 1953년 7월 27일 정전협정이 체결될 때까지 약 3년 동안 진행된 전쟁으로 전 국토는 폐허가 되었고, 수백만에 달하는 사상자와 1천만 명에 가까운 이산가족이 발생했다.

 만일, 건국 지도자들과 국민들의 결연한 호국(護國) 의지가 없었다면 신생 독립국 대한민국은 공산화되었을 것이다. 또한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이 6.25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다면 아시아는 물론 전 세계에서 공산세력의 확산을 초래했을 것이다. 6.25전쟁은 공산주의 세력에 맞서 싸운 자유수호전쟁이었으며, 선배전우들이 피로써 지켜낸 승리한 전쟁이었다.

▶준비하지 않은 전쟁

“한반도에서 우리는 준비하지 않은 전쟁을 치름으로써 값비싼 대가를 치렀다. 또한 승리는 많은 비용을 요구할 것이다. 그러나 그것은 패배할 때 치러야 할 비용보다는 훨씬 저렴할 것이다. -6.25전쟁 종군기자 마가리트 히긴스-

 위 내용은 6.25전쟁 발발 이틀 후부터 그해 12월까지 6개월간 전선을 취재했던 종군여기자 마가리트 히긴스(Marguerite Higgins)의 저서 ‘자유를 위한 희생(War in Korea)’의 마지막 결론이다. 그녀는 미국을 비롯한 자유진영이 한반도에서 공산주의 세력의 도발에 대비하지 않음으로써 얼마만큼 참혹한 희생을 치러야 했는지를 탁월한 시각으로 묘사했다.

 히긴스는 “우리는 그들이 말한 사태의 발생을 바라지 않기 때문에 그들의 말을 도무지 믿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실제 북한은 6.25전쟁이 발발하기 6개월 전부터 38선 지역 북한주민들에게 철수 명령을 내리고 남한을 침략하겠다는 삐라를 매일 살포했다. 그리고 크고 작은 도발을 끊임없이 자행하며 위협했다 그러나 북한의 도발위협은 심각하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결국 선배전우들은 국군이 전열을 제대로 가다듬고 방어선을 구축하기 전까지 북한군의 우세한 병력과 막강한 화력을 육탄으로 막아내야 했다. 하지만 개전 초기 많은 피해를 입었고, 3일 만에 서울이 피탈되는 아픔을 겪어야만 했다.

▶6.25 전쟁 첫 전승을 거두다

 그러나 모든 사람이 히긴스의 표현대로 전쟁을 치를 준비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당시 많은 지휘관과 장병들은 미비한 장비와 열악한 환경 속에서도 실전적 훈련과 확고한 정신 무장으로 북한의 도발에 대비하고 있었다. 그 대표적인 사례가 6월 호국인물인 김종오 육군 대장(당시 대령)과 그가 지휘하던 국군 제 6사단 장병들, 그리고 그들이 거둔 6.25전쟁 첫 전승인 “춘천 지구 방어전투”이다.

 춘천지구전투는 낙동강지구전투,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6.25전쟁의 승패를 가름한 3대 전승으로 평가받고 있다. 춘천지구전투가 3대 전승 중 하나로 인정받고 있는 이유는 서울을 빼앗긴 국군의 주력부대가 수원 이남에게 적에게 포위, 섬멸되는 것을 막는 결정적 역할을 했기 때문이다. 또한 춘천지구전투의 전승은 6.25전쟁의 미스터리 중 하나인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후 3일간 지체’한 이유를 가장 잘 설명하고 있다.

 6.25전쟁 당시 북한군의 기본전략은 ‘고도의 기동력’과 ‘집중된 공격’으로 한국군을 최단시간 내에 격멸한다는 단기속결전 이었다. 이를 위해서 북한군은 3일 내에 서울 부근의 국군 주력부대를 포위, 섬멸한 후 그 전과를 확대하여 남해안까지 진출한다고 계획하였다.

 중동부지역을 담당하고 있던 북한군 제 2군단의 공격계획은 주공인 제 12사단을 인제-홍천 축선에, 조공인 제 2사단을 춘천-가평 축선에 투입하여 한국군을 격멸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고속기동부대를 운용하여 수원 이남을 점령함으로써 서울을 포위하고 한국군의 퇴로 및 병력 증원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런데 북한군 기계회부대가 화천-양구로부터 서울로 이동하려면 반드시 춘천을 통과해야만 했다. 그러나 해당 지역을 책임지고 있던 국군 제 6사단이 북한군 제 2사단 및 제 12사단을 상대로 초기 방어에 성공함으로써 북한군의 진출을 지연시키고, 결과적으로 북한군의 초기작전계획을 무산시키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한 것이다.

 ▶춘천지구 방어전투의 승리요인

 춘천지구 방어전투의 승리요인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방어에 유리한 지형을 효과적으로 활용했다. 방어작전에서 지형조건을 적절히 이용하는 것은 필수적인 요소다. 특히 상대적으로 전투력이 열세하더라도 적이 불리한 지형에서 전투하도록 강요하는 것은 더욱 중요하다.


그러한 관점에서 제 6사단의 방어작전은 적의 기도를 정확히 판단하고 지형의 조건을 잘 활용한 탁월한 전투였다. 제 6사단은 북한강과 소양강 등 하천 장애물을 이용한 방어진지를 구축하고, 말고개와 원창고개 같은 지역을 이용하여 적의 취약점을 공격함으로써 북한군의 춘천 점령 기도를 3일간 저지할 수 이었다.

 둘째, 공세적 방어작전으로 적의 공격기세와 작전템포를 차단했다. 군사작전은 통상 공격작전에 의해서 그 목적이 달성된다. 클라우제비츠도 “방어는 공격하기 위한 호기를 포착하기 위해서 실시하며 순수한 방어만으로는 전승의 기회를 만들 수 없다”고 하였다. 공세적 방어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제 6사단은 적의 기습에 의해 최초 전투에서 돌파를 허용하였다. 그러나 이후 전투에서는 적의 약점을 간파하고 적극적인 공세행동을 통해 적의 공격기세를 차단하였고, 북한군의 전투력을 지속적으로 소모시켜 조기에 작전한계점에 도달하도록 만들었다.

 셋째, 투철한 전투의지로 병력과 무기체계의 열세를 극복했다. 최신형 무기체계는 개전 초기 전술적, 심리적 우위를 선점할 수 있는 효과를 가져다 주지만, 결국 전투에서 승리를 안겨주는 것은 전투원의 정신력이다. 6.25전쟁 초기 북한군의 전차와 자주포 등은 병사들에게 ‘전차공포증(Tankphobia)’를 유발하기에 충분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가장 우려되는 것은 전장 공포로 인한 사기저하와 전선이탈 현상이었다.

 그러나 제 6사단은 침착한 부대지휘로 병사들을 심리적으로 안정시켰다. 특히 제 7연대의 대전차포 소대장 심일 소위의 육탄 공격과 말고개 전투에서의 육탄 11용사의 활약으로 북한군 전차를 파괴함으로써 아군 병사들이 전차공포증에서 벗어나 과감한 공격정신을 발휘하게 만들었다.

▶철저한 전투준비태세가 승리의 열쇠

 그러나 가장결정적인 요소는 제 6사단의 철저한 전투준비태세였다. 당시 제 6사단은 적극적인 정보수집을 통해 북한군의 공격을 미리 예측하고 있었고, 그에 대비하여 산악능선에 철조망을 설치하는 등 사전에 진지를 완벽하게 구축했다. 또한 군의관까지 포술능력을 구비할 정도로 철저하게 간부들을 교육하였고, 모든 부대가 대대급 훈련을 마친 시기여서 높은 전투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당시 제 7연대장 임부택 중령은 “38선 부근에서 잦은 충돌을 통한 전투와 후방지역에서의 공비토벌작전 등으로 실전경험을 쌓을 수 있었다. 그리고 병사들의 자질이 우수했으며, 병력, 장비가 열세함에도 불구하고 하천선 방어와 산악지대의 지형을 이용해 방어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라고 증언하였다.

 대표적인 사례로 제 16포병대대의 맹활약을 들 수 있다. 당시 북한군 사상자 수에 비해 한국군의 피해가 매우 적었는데, 이는 근접전투보다 포병화력을 최대한 활용한 결과로 분석되었다. 제 16포병대대의 부대원들은 평소 강도 높은 훈련으로 사격술을 연마했기 때문에 전투수행능력 수준이 매우 높았다. 전쟁 이전 1949년 38선 경계선상에서 일어난 신남전투에서도 제 16포병대대의 능력은 유감없이 발휘되었다. 그러한 전투경험과 전투준비태세가 개전 초기 자연스럽게 행동화될 수 있었던 것이다.

▶준비된 자만이 전쟁에서 승리한다

 우리는 춘천지구 방어전투 사례를 통해서 준비된 자만이 전쟁에서 승리한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만일 6.25전쟁 당시 충분한 준비가 되어 있었다면 초기전투에서 피해를 더욱 줄일 수 있었을 것이다. 제 6사단의 성공적인 방어작전은 북한군 제 2군단에게 커다란 타격을 안겨줌으로써 북한군의 기본전략인 단기속결전 계획에 차질을 빚게 만들었기 때문이다.

 이 외에도 전투는 단순히 물질적인 힘뿐만이 아니라 전투의지에 의해 상대적인 전력의 열세를 극복할 수 있다는 교훈도 얻을 수 있었다. 히긴스도 그의 저서에서 “미국이 대량생산해야 할 가장 중요한 것은 용기이다.”라고 강조했다. 그녀가 그렇게 확신할 수 있었던 것은 첨단무기 등 물질적인 전력만으로는 전쟁에서 승리할 수 없다는 것을 직접 목격했기 때문이다.

 미국의 초대 대통령 조지 워싱턴은 1790년 1월 8일, 그의 첫 번째 의회 국정연설에서 “전쟁을 대비하는 것이야말로 평화를 유지할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의 하나이다.”라고 말했다. 이는 준비된 자만이 전쟁에서 승리하고 평화를 지켜낼 수 있다는 그의 신념을 단적으로 표현한 말이다.

 춘천지구 전투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준비하는 자만이 승리를 쟁취할 수 있다’는 교훈을 우리에게 남겨주고 있다. 위기의식, 확고한 대비태세, 일전불사의 전투의지가 충만할 때 전쟁을 예방하고, 나아가 승리를 쟁취할 수 있음을 명심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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