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시판

자유 게시판

강릉 남대천의 추역

페이지 정보

작성자 24회 김연식 작성일 2014-07-03 22:57 댓글 1건 조회 2,300회

본문

                    
  
강릉 남대천의 추억

 

영동지방의 행정,문화,경제,교육,관광의 중심지인 강릉은 백두대간 대관령(832m)과 남대천 그리고 동해바다가 잘 조화 되여 빚어낸 영동에서 으뜸 가는 고을이다.

 

생태계를 보전한 백두대간의 원시림에서 나오는 맑은 물이 여러 계곡을 따라 흐르다가 하나로  합쳐진 남대천 물이 강릉지방으로 흘러 내려 동해 바다로 유입 되는 이 젓 줄 같은 물줄기를 따라 마을이 형성 되면서 옛 부터 우리 조상들이 이 곳에 삶의 터전을 마련 할 수 있지 않았을까!

 

 남대천 물이 유입되는 동해바다는 조수가 없어 바다 물이 탁하지 않아 벽해(碧海)라고 부른다. 북 쪽은 대관령으로 막혔고 동남쪽은 바다와 통한다.

 

  이와 같은 천혜(天惠)의 자연환경에 둘러 싸인 이 지역에는 이름난 호수와 기이한 바위가 많아 높은데 오르면 기이한 바다가 보이고 골짜기에 들어가면 물과 돌이 아늑하여 경치가 나라안에 제일이다.”라고 세인(世人)들이 영동지방을 극찬하고 있다.

 

   이런 고장에서 태어나고 성장한 필자의 유,소년기는 세계2차대전 중이 였던 일제강점기의 핍박속에서 살았고
8.15해방을 맞이한 혼란기와 대힌민국정부 수립 후 얼마 되지 않아 6.25전쟁의 참화
를 겪었던 불행한 시기였지만 자연경관이 뛰어 나고 농,수산물과 다양한 과실들이 계절 따라 풍부하게 생산 되며 2,000 여 년의 유구한 역사를 지닌 전통과 고유문화의 향기 짙은 살기 좋은 강릉에서 태어나 유,소년기를 보내며 성장 할 수 있었다는 것은 개인적으로 큰 행복이요, 자랑이 아닐 수없다

 

 어린 시절 고향 친구들과 고향산천 여기 저기를 집 앞 마당처럼 뛰놀며 정들었던 이 곳을 6.25쟁 중이던 1952년 초 진해에 있는 해군사관학교에 입교하게 되여 19세가 되던 해에 떠나 온 이 후 지금까지 귀향치 못한 채 출향 인으로 객지에서 살고 있다

필자가 37회로 졸업한 강릉중앙국민학교는 인간으로서의 기본 품성을 길러 주었고 24회로 졸업한 강릉농업고등학교는 비록 실업 학교 였지만 당시의 교사진이 우수하여 필자의 학문적인 기초를 확실하게 딱아 준 곳이며 이 모교를 용강동에서 통학하기 위해 매일 남대천과 강릉대교를 건너야 했으며 마치 강릉농업학교의 관문인 것 처럼 포풀라 나무 숲과 과수원 사이 길을 통과 하여야 등교할 수 있었고 귀가 길도 이 길을 되 돌아 와서 남대천을 건너야 했으니 5년간 모교를 왕복한 통학 길 뿐 아니라 그 이외에도 남대천과 접촉한 회수 까지 고려 한다면 혜아릴 수 없이 많지 않았겠는가! .즉 남대천은 바로 내 집 앞에서 흘러 내리는 개천처럼 필자의 일상생활 속에 흐르고 있었던 것이다..

  

    그래서인지 고향강릉을 생각하면 그 곳에서 태어나 떠날 때 까지 유,소년기의 삶 속에서 강릉 남대천의 아름다웠던 천변풍경(川邊風景)이 어린 시절의 오래된 기억속에서 잊혀 지지 않고 지금 까지 가장 강렬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전영권의 글 살아있는 강릉남대천에 기술된 남대천의 정의를 인용 해보면 곤산봉과 대관령을 거쳐 능경봉,삽당령과 두리봉에 이르는 백두대간 능선 깊은 청정 계곡들의 크고 작은 물줄기들이 한데 모여 들어 만들어 내는 강릉 남대천의 유역면적은 260 입방km 이고 길이는 32km인 강릉남대천의 발원지는 두리봉(왕산면 목게리남쪽)과 대화실산 북쪽 기슭 사이의 울창한 숲이다.이곳의 힘찬 물줄기가 삽당령과 목계 계곡을 거쳐 도마천을 이루고 한편 화란봉-제왕봉 사이의 맑은 물은 닭목재와 큰골 계곡을 지나 왕산천이 된다.상수원 보호구역에 자리잡은 도마천과 왕산천은 오봉저수지에서 만나 합쳐진다. 대관령-선자령과 선자령-곤신봉에서 각각 뻗어 내리는 물줄기들은 각각 치마골,보광리를 거처 보광천이되어 도마천,왕산천의 합수된 물과 만난다. 이들 세 하천은 성산면 구산리에서 하나가 되어 강릉 남대천을 이루고 섬석천의 물과 합쳐져서 동해로 흘러 들어간다.”라고남대천의 발원지와 물의 흐름을 구체적으로 정의,설명하고 있다..

 

필자가 본 옛 남대천은 성산면의 상류부터 산 골짜기 물이 바위와 돌을 타고 계곡을따라 흐르다가 도심 변을 지나면서 물 살을 타고 떠 내려 온 돌과 흙이 작은 자갈과 흰 모래로 부서 저 씻겨서 하천 바닥에 깔리고 강물이 흐르는 왼편 시내 쪽은 홍수를 막기 위한 제방 둑이 쌓여 저 있었으나 반대편인 오른편 남쪽에는 제방 둑이 없었고 물이 흐르는 오른쪽에 흰 모래 백사장이 넓게 퍼 저 있었으며 흐르는 수량(水量)도 정강이를 넘칠 정도의 상당한 깊이와 강폭으로 냇물이 흘렀다.

 

차량이 다닐 수 있는 다리는 강릉대교 하나 뿐 이였고 그 상류 쪽 가까이에 철교가 완성되지 않은 채 교각 만 10 여 개 세워 저 있었고 현 남산교 위치에 통나무와 송판으로 역어 만들어진 나즈막 한 통 나무다리 하나가 놓여 있었으며 이 부근의 강 오른쪽 방향의 천변에는 흰 모래사장이 넓게 형성되여 있었다.

 

특히 강릉대교를 건 너자 왼쪽으로 돌아 입암동 현 강릉 중앙고등학교로 내려 가는길 왼쪽 제방 둑이 없는 남대천변에 병행해서 빽빽하게 심어 저 있던 백 여 그루 이상의 20m 정도의 높이로 하늘을 향해 죽~ 뻗은 둘레가 한 아름 되는 대형 포플라(popular)나무가 몇 겹으로 길게 줄 서 있었고 오른쪽에는 나란히 대칭 해서 나무 말뚝을 박고 철조망으로 울타리를 친 큰 사과 과수원이, 이 사이 길 따라 길게 마주하고 있었다. 포플라 나무와 과수원 사이에 만들어진 넓이 3~4m 폭에, 길이 7~800m 정도 거리의 좁은 보행 및 자전거용 도로인 꾸불텅한 흙 바닥 길을 책 가방을 손에 들고 강릉농업학교를 5년간 걸어서 왕복하며 통학하였다.

 

이 구간 일대의 환경은 남대천변의 풍경을 전체적으로 보았을 때 그 중 제일 가는 명품구간으로 꼽히는 곳이다. 이 구간을 걸으면서 포플라 나무 숲 속의 신선한 공기를 마시고 잡풀과 흙냄새를 맡으면서 여름철에는 뜨거운 햇살을 가려 주는 나무숲 속의 시원함으로 신록의 기운(생물이 살아 움직이는 힘의 근원)을 얻고 겨울철은 대관령에서 불어 오는 매섭게 추운 삭풍(朔風)을 병풍처럼 막아 주던 포플라 나무 숲과 과수원 사이 길에서 아늑하고 따뜻함을 느끼면서 미래의 꿈을 키웠던 학창시절의 낭만과 독특한 정취는 두고 두 고 잊을 수 없다.

                                           

이 뿐인가 이 포플라 나무 길 천변인 현 강릉대교와 월드컵교 사이의 냇물에서 주로 멱을 감으며 물 놀이도 하고 물고기를 잡았다.

 

예전에는 남대천 물이 맑아 미꾸라지,모래무치, 은어, 지름종아리,붕어새끼,민물게,민물새우,메기,칠성뱀,민물 장어 등 다양한 담수어와 냇가 수풀에는 개똥 벌레(반딧 불) 같은 곤충이 서식하고 있었다.냇가의 물 풀 숲 앞에 소형 반두(양 끝에 손 잡이 막대기를 댄 어망)를 치고 물 풀 숲을 발로 쑤시면 나오는 다양한 물고기를 반두를 걷어 올려 잡거나 맑게 흐르는 강 바닥 모래 밑에 파묻혀 숨어서 숨 쉬며 노출시킨 몇 개 구멍을 발견하면 그 위치에 한 손바닥을 한 끝 펴서 가득 모래를 웅켜 쥐면서 모래 밑에 숨어 있는 모래무치가 미끄러 저 빠저 나가지 않도록 한 옴큼 움켜 쥐어 잡던 기억이 새롭다.

 

 남대천 상류인 현 처음처럼 소주공장 인근에서는 가을철이면 급한 물살을 타고 힘차게 번득이며 헤엄 처 상류 쪽으로 올라 가는 은어 떼를 쫓아 낙씨대로 은어 놀림 낙 씨(산 은어 한 마리를 물속에 씨 은어로 혜엄 치게 해서 따라 오는 은어를 잡는 방법)를 하기 위해 바지 가랑이를 걷어 올리고 물속에 들어 가 늘어 선 여러 명의 낙 씨 꾼들을 볼 수 있었다.

 

요즈음 가끔 귀향 길에 남대천을 훑어 보면 옛 천변풍경은 찾아 볼 수 없을 만큼 크게 변했다. 남대천에 흐르는 수량은 마르다 싶이 크게 줄었고 냇물과 하천 바닥은 오염되여 맑지 않으며 상류부터 하류 까지 형성 되여 깔려 있던 조약 돌과 자갈, 차돌과 흰 모래 사장이 없어진 자리에 잡풀이 무성하게 자라고 있는 황폐해 진 풍경을 보면서 어린 시절의 기억 속에 자리하고 있는 하얀 모래 하천 바닥이 투명하게 들여다 보이도록 맑은 물이 흐르던 예전의 남대천 천변풍경이 몹시 그리워 진다.

 

    입암동 가는 꾸불텅한 흙 길에 빽 빽히 들어 서 있던 한 아람 되는 대형 포플라 나무 숲을 마주한 과수원 일대의 사라 저 버린 아름다운 천변풍경은 현실적으로 되 살리기 어렵겠으나 예전의 흰 모래 백사장에 맑은 물이 흐르던 남대천에 서식했던 다양한 담수 어들이 회귀(回歸) 하고 냇가 물 풀 숲에서 서식했던 개똥 벌레가 밤이면 반딧불을 반짝거리며 날아 다닐 수 있도록 하는 생태복원은 가능하지 않겠는가!

.

   여기에서 우리 향토의 문화유산과 관련하여 강릉문화원이 발행한 강릉의문화유적책자를 잠깐 살펴 보면국가지정문화재는 국보급,보물급을 비롯한 유,무형문화재,와 강원도지정 지방유,무형문화재 등 값진 전통과 문화유적이 곳 곳에 가득할 뿐 아니라 대관령에는 대관령성황사(강릉단오제의 주신(主神) 범일국사를 모신 곳)와 대관령 산신각(신라가 강릉지방을 북변 영토로 삼으면서 파견한 김유신장군이 화부산 기슭에 진을 치고 말갈족의 침범을 막아 주어 향촌민들의 불안감을 해소 시켰다는 역사가 있었기에 강릉을 보호해 준다는 상징적 의미로 대관령 산신으로 김유신 장군의 위패를 모신 곳)이 위치하고 있으며고대로 부터 전해 저 내려 오는 신화와 설화도 많아 신비로운 고장임을 알게 된다.. 또한 예로 부터 문장과 덕행이 뛰어난 향현(鄕賢) 향토인물들이 많이 배출됬다고 하여 문향(文鄕)의 고장이 라고 일커르며 여기에 더해서 효자,효부 ,열녀도 많이 나온 곳이라 하여 예향(禮鄕)의 고장이라고 도 한다. 참으로 놀랍고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 아닌가!

 

대관령,남대천,동해바다가 하나가 된 신이 내려 준 천혜의 자연환경 속에서 옛 부터 신()),자연(自然),인간(人間)이 조화 되여 신을 믿고 숭배하며 순박하게 살아 온 우리 선조들이 삶의 터전을 일구어 온 이 곳 강릉! 그 중심에 흐르고 있는 남대천은 강릉발전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친다...

그러나 예전의 모습을 상실한 이 남대천의 퇴화,손상,파괴된 생태계의 복원 없이 미래의 강릉발전

을 설계할수 없다. 남대천의 복원은 인간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 자연중심적인 사고와 태도로

복원사업계획을 수립하여 강력히 실천하고 추진할 때 만이 강릉남대천은 우리들의 추억 속에 남

아 있는 자연생태계적 예전의 아름다운 모습으로 다시 살아 날 수 있을 것이다..

         4336

                     
 

댓글목록

profile_image

복상님의 댓글

복상 작성일

중앙고등학교 동창회 홈페이지에 처음으로 가입하여.....제독님의 글을 감명깊게 읽었습니다. 강릉의 젖줄인 남대천에 대한 많은 역사를 새삼 알게되어 감사드리며, 명문 중앙고등학교의 수 많은 동문님들의 모교를 사랑하는 열정적인 마음에 감동을 받았습니다. 명문 강릉중앙고등학교와 총 동창회가 앞으로 더욱 발전하기를 기원합니다. 꿉벅....짝짝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