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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조폭 집 가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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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 작성일 2018-07-14 17:31 댓글 0건 조회 769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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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느 조폭 집 가훈


   어느 조직폭력배 두목 집에 가훈이 착하게 살자.”로 되어 있다는 웃지 못 할 이야기도 전해지고 있다. 조직폭력배라 하여 가정을 두지 말라는 법도 없고, 가훈을 두지 말라는 법은 더더욱 없다고 본다. 누가 가훈을 뭣으로 쓰던 간에 주변에서 잔말이 많은 것이 더 이상하다고 생각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런 교훈적 캐치프레이즌도 격게 맞게 써야 제 맛이 날 수 있다는 것을 우리는 역사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과거 우리나라 모 대통령이 정의사회 구현이라는 거창한 구호를 외치면서 내치 외치에서 병폐가 되었던 부분이라 생각되었던 부분을 자신들의 잣대에 맞추어 마구 집행했던 역사가 있었다. 누가 보아도 그 대통령 자체가 정의로운 방법으로 그 자리에 오르지 않았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그 입에서 정의사회를 부르짖었다는 것이에서 국민적 호응을 받기에는 한계가 있지 않았나 싶었다. 시간이 지나 대통령이 많이 바뀌면서 어떤 대통령은 정직을 자신의 집 가훈으로 두고 있으면 자신은 정직하게 삶을 살아왔고 앞으로도 그렇게 살겠노라를 다짐하면서 그 직책을 수행했던 사람도 있었다. 당시에도, 후일에도 그 사람이 정직을 외칠 정도로 정직한 인생을 살아오지 않았다고 많은 사람들이 믿고 있다는 것이다. 자신이 별로 정직하지 않았기에 정직하게 살고 싶다는 욕망에서 정직을 가훈으로 두었다면 할 말이 없지만, 정직을 자신의 신념으로 금과옥조처럼 여기면서 산다고 말하는 것 자체에서 신뢰성을 인정받기에는 한계가 있었다고 본다. 그 두 사람은 결국 영어에 몸으로 한 명은 감옥에서 살았고, 정직을 부르짖었던 한 명은 감옥생활을 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정직과 정의를 부르짖었으면 그런 곳에 가지 않도록 조신하게 살아야 하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렇다면 착하게 산다는 것, 정직하게 산다는 것이 어느 수준까지를 두고 한 말일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리라 본다. 착한 기준이 어디냐는 것이다. 또한 정직의 잣대는 어디까지냐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삶을 사는 것에다 두는 경우도 있을 것이고, 또 어떤 사람은 남에게 피해를 주지 않음은 물론 배려의 정신까지 가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조폭 가정에서 사용되는 착함의 기준은 평범한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 보다 다른 차원의 잣대를 사용하리라 짐작이 된다. 원래 착함의 기준도 절대적이 아니라 상대적이기에 사전적으로 표현하기에는 무리가 있다는 이야기다.

 

   그와 유사한 어감으로 쓰이는 문장이 점잖게 살자가 아닐까 생각된다. 이 점잖의 기준도 사람마다 다 다르다고 느낄 것이다. 같은 행동을 하는데 어떤 사람은 점잖게 느껴지는 반면 또 어떤 사람은 엄청 어색하게 느껴지는 경우도 있을 것이라는 것이다. 행동은 유사하지만 누가 하느냐에 따라 점잖을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것이다.

 

   점잖은 것을 추구 하는 세계는 젊은 축보다는 나이가 든 축에 더 많이 사용되는 언어일 것이다. 젊은 아이에게 너 참 점잖구나.”라고 표현한다면 그 사람은 긍정적으로 받아드리지는 않을 것 같다. 생기발랄하고 미래가 창창하면서 열기가 충만한 나이 대에 있는 사람에게 그런 말을 쓴다는 것 자체가 별로 어울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혈기 왕성한 때에 어울리는 이야기가 따로 있다는 것쯤은 알고 언어를 구사하면 더 좋지 않을까 싶다.

 

   반면 나이가 든 사람이 오두방정을 떨면서 살아간다면 그 사람에게는 , 낫살이나 먹었으면 좀 점잖아 질 때도 됐는데.”하면서 핀잔을 받을 수 있을 것이다. 같은 단어지만 인생의 시점에 따라 어울리는 경우도 있고 그렇지 않은 경우도 있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었으면 전반적으로 좀 점잖게 여유를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더 바람직하다고 생각할 것이다. 물론 그렇지 않게 생각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고 그것에 대해서 뭐라 하는 사람도 없으리라 본다. 나이 먹고 방정을 떨지 말라는 것도 법에 나와 있지 않음으로 스스로 판단에 맞기면 간단히 끝날 문제인 것이다.

 

   나이를 먹으며 나이 값이라는 것을 해야 한다는 관념에 젖지 않을 수 없다. 장유유서라는 이야기가 왜 나왔겠는가? 나이를 먹으면 거기에 걸맞은 행동을 했을 때 대접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어서 해야 할 일이 있고 하지 말아야 할 일이 있다는 것쯤은 알고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비슷한 일을 해도 젊은 사람들이 하면 용납이 되지만 나이를 먹은 사람이 하면 추접스러운 일들이 점점 많아져 가고 있다. 매체가 발달하면서 나이에 걸맞지 않은 행동을 하여 많은 사람들로부터 눈살을 찌푸리는 이야기들이 심심찮이 발생되고 있다.

 

  점잖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에 대한 제어를 잘 하라는 이야기다. 젊었을 경우 혈기왕성함이 제어력보다 더 강하기에 강한 액션이 나올 수 있다고 본다. 나이를 먹고 제어력이 떨어지는 행동을 서슴지 않고 한다는 것은 결코 환영받을 일이 아니라 본다. 단적인 사례로 과음을 한 후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면 동네를 활보한다고 생각해 보자. 젊은 사람들이 그런 행동을 해도 눈살이 찌푸려질 터인데 나이를 먹고 그런 행동을 한다면 정신 차린 후 어떻게 추슬러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 고민을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젊은 나이에 길길이 날뛰던 사람도 나이를 먹으면 점잖은 방향으로 변하게 된다. 변하고 싶어서 변하는 것이 아니라 고뱅이에 힘이 빠짐으로 타인이 봤을 때 점잖게 보일뿐인 경우도 있을 것이다. 신체의 노화로 인하여 자연스럽게 행동도 느려지고 타인에게 피해를 줄 일도 줄어들면서 점잖은 축으로 기우러지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점잖은 것이 행동의 느려짐만으로 표출이 된다면 이 또한 반쪽자리의 점잖일 것이다. 의식의 세계에서도 같이 움직여지는 것이 더 바람직할 수 있을 것이다. 생각하는 영역에서도 지금까지 쌓은 경험이나 지혜를 타인에게 나누어 줄 수 있는 여력을 갖추어야 한다는 것이다. 젊은 날에 타인에게 감동을 줄 수 있는 일을 적게 한 사람은 베풀어줄 곳간이 비어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타인에게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행동이나 언행은 삼가야 한다는 것이다. 나이를 먹을수록 제어를 할 수 있는 여유가 더 많이 생길 수 있기 때문인 것이다.

 

  어쩌면 점잖게 산다는 것은 나이를 먹어 가고 있다는 반증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젊은 사람이 점잖다고 느껴진다면 아주 반듯하면서도 노련하게 살아가는 사람이라 보면 될 것이다. 하지만 나이가 든 사람을 보고 저 사람은 반듯한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 보다는 저 사람은 점잖은 사람이야.”라고 말하는 것이 더 어울리지 않을까 싶다. 이것저것 다 따지다 보면 골이 아플지 모르지만 나이를 먹으면 생각이고 행동이고 간에 모든 것이 느려진다는 것이다. 그것을 다른 사람들이 보면 점잖게 보일뿐이라는 생각도 해 본다.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식의 점잖을 선호하지는 않으리라 보지만 냉엄한 현실을 빗겨 가는 것도 용이치는 않으리라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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