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울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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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50 작성일 2022-07-07 06:18 댓글 0건 조회 140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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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 아버지가 그리워진다. -2-

 

 

농산물을 수확할 때는 또 어떤가.

예를 들어 감자의 경우를 들여다 본다.

당시에 농사는 판매보다 우선 식솔들의 먹거리를 해결해야 하는 절박한 상황을 해결하는데 방점이 

찍혔다.

소위말해 보릿고개를 넘기는 것은 경상도와 같이 보리를 많이 재배하는 곳에 이야기이고, 강원도 

같은 경우는 그 시점에 감자가 생산된다는 것이다.

굶어죽을 상황을 살짝 넘겨 줄 수 있는 유일한 작목이 바로 감자인 것이다.

그렇다보니 자연스럽게 감자농사에 사활을 걸 수 밖에 없는 처지에 놓이게 된다.

 

 

감자 재배는 생각보다 훨씬 더 많은 손과 노력이 가게 되어있다.

거름이나 비료를 제대도 하지 않으면 수확이 줄어들 수 밖에 없는 구조이다.

지금처럼 운반차량이 원활한 것도 아니고, 거름도 20kg씩 포장해 놓고 사용하기 편하게 해 놓은 

시절도 아니었다.

오로지 손발로 작업을 해야 하는 상황이었음으로 재배과정은 그야말로 온 몸을 불사르는 과정이

 었다.

감자 캐기도 지금처럼 기계가 파 엎어 놓은 상태에서 박스에 담아 경운기나 차량에 실어 나르는 

구조도 아니었다.

삼태기로 주서 담아 바소가리가 있는 지게에 담아서 집까지 날랐다.

농사가 잘돼도 걱정인 게 너무 많이 생산되면 이 또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상황이 발생된다.

게다가 날씨라도 더우면 쌓아놓은 감자가 썩어서 수시로 뒤집어 주면서 골라내야 하는 일도 

다반사였다.

지금처럼 이렇게 무더운 여름날 헛간에서 냄새가 나면서 썩어가는 감자를 뒤적거리는 작업

 또한 만만치 않은 일이었다.

 

 

울 아버지가 50대 정도 되었을 때 산골에 논뙈기를 하나 구입했다.

쌀밥을 얻어먹을 수 있는 유일한 기회가 된 것이다.

하도 산골이라 400여 평 정도 되는데 논 다랑은 스무 개가 넘었던 기억도 난다.

집에서 거리도 10여리가 다 될 정도로 멀었다.

산과 언덕을 몇 개 넘어야지만 갈 수 있는 곳이다.

그래도 쌀밥을 먹을 수 있다는 일념에 힘든 줄 모르고 논농사를 지었던 기억이 생생하다.

산골에 있는 논이라 평지처럼 반듯한 논이 아니었다.

논씀의 높이가 1미터 이상 되는 곳도 부지기수였다.

어떤 논두렁은 개샘이 나와서 가을이 되어도 벼가 익지 못하고 새파랗게 이삭을 he이 세워져 

있던 모습도 생생히 떠오른다.

봄철이 되어 가래질을 하려고 가보면 겨우내 얼었던 논다랑이 다 무너져 있었던 모습이 생생하다.

옆에 있는 산에서 나무를 잘라다 말뚝을 박아서 고정시키고 논다랑을 다시 만들다 시피 했다.

가래질은 얼마나 힘든가.

허구많은 농사일 중에서 가래질이 가장 힘들다고 본다.

이유는 물기가 묻은 질컥한 땅을 파서 논씀을 만들어야 하는 작업인 관계로 엄청난 힘과 노력이

 들어가야 하는 작업이다.

보통 사람이 십여 분만 그 작업을 한다면 손 발 다 들고 못하겠다고 할 정도로 힘들고 고된 

작업이었다.

 

 

지금처럼 제초제가 있던 시절이 아니었던 만큼 때가 되면 논 제초를 했다.

오로지 손끝으로 논을 휘저으면서 잡초를 제거하고 논바닥에 꾹꾹 집어넣었다.

모래땅이었던 관계로 논바닥을 손으로 긁어서 김을 매다보면 손끝이 다 달아서 피가 날 

정도까지 된다.

그래서 여름철에는 아예 손톱도 깍지 않게 된다.

짧은 손톱으로 논바닥을 긁어 가면서 제초작업을 하다보면 손끝이 배겨날 장사가 없는 것이다.

 

 

그렇게 고된 노동의 끝에도 가을은 찾아오게 된다.

산 중이라 새나 짐승의 피해도 만만치 않다.

기껏 농사를 지어 일부는 그들의 식량으로 제공하는 불상사도 발생하게 된다.

그걸 좀 피하기 위하여 조금 일찍 수확하여 물이 탱탱 불어있는 볏단을 일일이 지게에 져 날아왔다.

마른 볏단이면 좀 가벼울는지 모르지만 금방 벤 벼를 지게에 지고 나르는 일은 생각보다 훨씬 더 

어렵고 고통스러웠다.

현장에서 말리다보면 짐승에게 다 빼앗길 처지가 되다보니 고육책으로 생벼를 지게로 나르는 

불상사가 발생된 것이다.

지금처럼 방조망 같은 것이 있거나 비닐이 발달하여 뒤집어 씌워서 말린 다음 날라오면 

수월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농자재 자체가 없었던 관계로 모든 일을 힘들게 할 수 밖에 

없었다.

 

 

 

벼를 타작한 다음 방아를 찧는 것도 오로지 수작업이었다.

디딜방아를 걸어 놓고 하루 종일 디뎌서 쌀을 만드는 것이다.

좀 쉽게 도정을 하기 위하여 정미소로 갈 수 는 있었지만 그까지 이동하기 위해서는 또 

지게질을 해야 하는 것이다.

그렇다고 벼의 생산량이 많은 것도 아닌 관계로 할 수 없이 디딜방아나 절구를 이용하여

 도정을 하는 것이다.

사람 손끝이 가지 않으면 아무 일도 못하던 시절이었던 것이다.

 

 

벼농사도 만만치 않았지만 콩이나 옥수수 농사도 녹녹치 않았다.

콩을 꺾어서 단을 묶은 다음 쌓아서 말리게 된다.

그런데 이 콩을 꺾어서 수확하는데 이 작업 또한 녹녹치 않다.

꼬투리가 손에 찔리길 수도 없이 반복해야 했다.

다 마른 콩을 타작하는 것도 큰 일 중 하나였다.

콩 타작은 오로지 도리깨질로 처리하였다.

이 도리깨질도 재미삼아 몇 번 하면 그럴싸할는지 모르지만 하루 종일 하고 나면 팔이 

떨어질 정도로 아플 수 밖에 없다.

오로지 몸으로 때우는 작업의 연속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지금은 목장갑이라도 끼고 일을 하면 손에 상처가 좀 덜 했겠지만 당시에는 그런 것도

 전혀 없었다.

오로지 맨살로 일을 하다 보니 찔리고 할퀴고 찢어지는 것은 다반사였다.

밴드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고, 살 잘 아무는 연고가 있던 시절도 아니었다.

그냥 곪을 대로 곪고 문들어질대로 문들어지면서 아무는 식으로 때웠던 시절이었다.

 

 

늦가을이 되면 짚을 구하여다 헛간 지붕 같은 곳에 이엉을 엮어서 월동 준비를 하였다.

밤새 새끼를 꼬고 이엉을 배어서 지붕을 해 덮었다.

이 일 또한 녹녹한 작업이 아니었다.

용마루 이엉도 만들어야 하고 보통 이엉도 만들어야 했다.

일일이 수작업으로 그렇게 많은 면적을 덮게 할 정도의 량을 만드는 것도 결코 용이한 

문제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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