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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릉향교의 속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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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조규전50 작성일 2024-01-02 20:55 댓글 0건 조회 196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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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향교의 속살

  

 

11일은 잔뜩 흐린 가운데서 새해 해맞이를 하게 되었다.

요맘때가 1년 중 가장 추운관계로 좀해서 비나 눈이 오는 경우는 드물었다고 본다.

해맞이를 많이 해 봤지만 올처럼 이렇게 잔뜩 흐린 가운데 맞이한 경우는 없었다고 본다.

특이하고 특별한 경험이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 생긴 것이다.

살다보면 이런 날도 구경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 올 해맞이 행사였다.

아침에 마누라보고 해맞이 하러 가자고 했다가 핀잔을 한 방 먹었다.

뜨지도 않을 해를 무슨 재주로 맞이하냐는 식의 이야기를 듣고 반문을 가했다.

가족 간에도 이견이 나왔지만 결국은 가족 모두가 해맞이를 하러 남항진으로 갔다.

 

그렇게 해맞이를 마치고 아침은 남항진에서 상상으로 뜨는 해를 바라보면서 해물탕으로

 의미 있게 때웠다.

그리고 난 다음 아이들을 역까지 바래다주고 집으로 오는 길에 향교 길로 자연스럽게 

접어들게 되었다.

신년 초하루지만 딱히 할 일도 없었던 차에 향교로 올라가는 신작로를 따라서 올라갔다.

처음 가 본 길이라 당연히 향교 안에 새로 만들어 놓은 주차장으로 통하는 길이겠거니 

하면서 갔는데 명륜고 운동장이 바로 나왔다.

예상이 완전히 빗나가면서 엄청 실망했다.

기왕 간 김에 명륜당 앞에 차를 세워 놓고 껍질만 보고 오려는데 향교를 보러 온 아줌마와 

아저씨들을 만났는데 그들이 향교 문을 열고 그 안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겠는가.

 

나도 이 지방에서 태어나 여기에 있는 중학교까지 나왔지만 향교 안에 들어가 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주변머리가 없어서 그런지 아니면 향교 안에 뭣이 들어 있는지 관심이 없어서인지는 

모르지만 아직까지 그 안에 발을 디딘 적 없었기에 호기심 반으로 같이 발을 디뎠다.

삐걱거리는 나무로 된 출입문을 지나자 소방 관리를 하시는 분이 나와서 안내를 해 주었다.

마침 11일 휴일인데도 불구하고 문화해설사분이 나와 계셨다.

 

그 분을 따라서 머리에 털 나고 난 이후 향교 안으로 처음 들어가 보게 되었다.

건축물은 사찰과 크게 다를 바 없었다.

굳이 차이를 두기에도 좀 애매할 정도로 모양새가 거의 절과 비슷한 모양이었다.

사찰 중앙에 대웅전(大雄殿)이 있다면 향교에는 대성전(大成殿)이 있었다.

모양도 사찰에 있는 대웅전과 큰 차이가 없었으며 굳이 차이를 둔다면 부처를 

모셨느냐 유교 교주의 위패를 모셨느냐의 차이 정도일 것 같다.

 

강릉의 향교는 규모나 역사면에서 전국에서 손꼽을 정도로 유명하다고 한다.

그 안에 모셔진 위패는 공자님을 비롯하여 그의 제자들과 맹자와 중국 성현의 

위패를 모시고 있다고 한다.

그리고 특이한 점은 우리나라의 유학에 선구자격인 설총, 최치원, 정몽주, 이황

이이가 모셔져 있다고 한다.

 

강릉향교가 시발점이 된 것은 700여 년 전이라고 한다.

조선의 개국과 함께 유교를 숭상하는 의미에서 한양에는 성균관을 지방에는 

향교를 설치하여 유림들을 길러 내는 교육기관으로 발전을 시킨 것이다.

현존하는 강릉 향교는 1721년 개축한 이래 당시의 원형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고 한다.

특히 이 안에 건물 중에는 보물로 지정된 것도 있다고 하니 상당히 귀한 건축물임에

는 틀림없는 것 같다.

 

향교는 지방마다 다 존재하였고 지금도 그 그루터기가 여전히 남아 있는 곳이 많다.

우리나라 지방에 가면 세부 고을 명 중에 교동이라는 명칭이 없는 곳이 없을 정도이다.

교동이란 지역명이 생긴 이유가 바로 향교가 있었던 곳이라 보면 틀림없을 것이다.

조선시대의 지방에 학교가 향교였고 그 향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쳤음으로 가르치다는

 뜻을 가진 자를 써서 지역명을 만들게 바로 교동인 것이다.

우리 강릉에서도 향교가 존재했던 영역을 교동으로 이름 붙여 지금까지 잘 사용하고

 있다고 보면 될 것이다.

 

그런데 향교에서는 크게 두 가지 일을 했다고 한다.

하나는 유교의 뿌리를 숭상하는 상징적인 공간으로 사용되었고 또 하나는 지역의

 아이들 교육기관으로 역할을 하였다는 것이다.

그래서 그런지 모르지만 강릉 향교 안에도 들어가 보면 대성전에는 공맹자와 함께 

우리나라 유교발전에 큰 공헌을 한 유학자를 모셔놓았다.

그리고 명고 운동장에서 보았을 때 길쭉하게 만들어진 건물은 지금으로 말하면 학교

 교실인 것이다.

 

조선시대에는 서당에서 글을 터득하여 그 다음 단계로 향교에서 공부를 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 향교에서 공부를 할 수 있는 아이들은 100명도 채 되지 않았다고 한다.

향교에 들어가기가 여간 어렵지 않았기에 부모가 토호세력이거나 재산가가 아니면 

쉽게 들어갈 수 없었다고 한다.

여기서 공부한 학동 중에 돈이 많거나 권력이 있는 자의 자식들은 성균관으로 보내져서

 고급 관리로 들어가는 길로 갔다고 한다.

강릉향교는 지금으로 말하면 중 고등학교 정도 수준의 교육이 이루어졌다고 한다.

재미있는 일은 당시에 이 향교에 입학한 학생들에게는 병역면제의 혜택이 있었기에

 더더욱 입학경쟁이 치열했다고 한다.

 

여기서 공부하는 학생들은 집안이 잘 살거나 사대부, 지역토호세력 정도 되어야지만

 수학을 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일단 경제력이 따라 주지 않으면 공부할 수 없는 구조로 만들어졌었다고 한다.

명륜당 옆에는 지금으로 말하면 기숙사 비슷한 건물이 있는데 숙만 제공되고 식은

 각자가 해결하는 구조로 되어 있었다고 한다.

지금처럼 향교 밖에 맛집같은 식당이 널널하던 시절이 아니었던 관계로 식은 집에서

 날라다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밥을 누가 날라 주었겠는가?

극성스러운 엄마나 아빠가 날라준 것이 아니라 주로 하인이 날라 주었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하인이 없는 집에 자제는 아예 들어올 꿈도 못 꾸었으리라 본다.

지금보다 교육의 불평등이 너무 심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게다가 여자들은 아예 이 향교에 발걸음도 들여 놓지 못하게 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물론 여자가 여기에 들어와 배운다는 것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세상이었다는 것이다.

 

향교에 큰 역할 중 하나가 공맹자와 그 제자, 그리고 우리나라 유림의 고수 분들을 

위한 제례라 본다.

이 제례를 석전제라 하는데 봄가을 두 번에 걸처서 봉양한다고 한다.

제례의 절차나 과정은 생각보다 훨씬 더 정교하고 엄격하다고 한다.

제례에 참석하는 사람들은 사당에 들어가기 전에 손을 깨끗이 씻고 임해야 하며 

주관하는 초 아 종헌관이 직접 술잔을 들고 봉양하는 경우는 없다고 한다.

제례를 준비해 주는 사람들이 수발을 다 들어준다고 한다.

이때는 아마 일반에게 공개를 하는 것 같은데 그걸 보려고 일부러 가는 것도 좀 

그렇지 않나 하는 생각도 들어간다.

 

조선시대엔 유교가 거의 종교적일만큼 일상생활에서 생활화 되었다고 본다.

대표적인 사례가 관혼상제에서 나온다.

인간이 살아가는 세상에서 삶과 죽음까지 가는 과정에 모든 의식은 유교적 

입장에서 치러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유교적인 철학에 젖어 있다가 서구문물이 들어오면서 새로운 문화가 있다는

 것을 비로소 보게 된 것이다.

유교가 조선조 500년 동안 정신적 지주로서 역할을 했다는 것은 그만큼 가치가

 있다는 반증이 될 수 도 있을 것이다.

작금에 들어와 온 세상에 문화가 섞이다보니 이제는 유교문화도 수많은 문화 

중에 하나일 뿐이 되어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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